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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마리 Oct 18. 2021

에스토니아와 한국의 평행이론

중세시대로의 타임슬립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중심부에 들어서면, 연한 회색의 석회암으로 만든 기둥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역과 마주하게 된다. 현존하는 26개의 기둥 사이에 있는 문을 잘 찾아들어가면 바로 13세기로 타임슬립 할 수 있다.

톰페아 언덕 전망대에서 본 탈린 올드타운의 전경

탈린의 올드타운은 13세기부터 에스토니아로 들어온 한자동맹의 상인들이 건축한 마을이다. 그들은 독일의 라인강에서부터 발트해 연안과 북해까지 뻗어나가며 해상무역을 펼쳤는데, 에스토니아의 탈린은 한자동맹에서도 중요한 도시로 발트해 연안의 수산물과 자연광물, 농작물, 산업원료 등을 서유럽 쪽으로 실어 나르는 중심 항구도시였다.

그들이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꽃피운 문화와 부를 상징하듯 유럽에서도 드물게 중세시대의 마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탈린의 올드타운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마을의 아랫부분에는 상업시설과 주거시설, 종교시설이 남아있고, 마을 윗부분인 톰페아 언덕에는 마을의 행정시설이 남아있다.


나는 탈린에 머무는 2개월 내내 올드타운 안에서 거주했는데, 매일 약 30만 평(1백만 제곱미터) 면적의 마을 안을 옛 성벽을 따라 산책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한국으로 치자면 한옥 마을 안에서 매일 생활하는 느낌이랄까. 집 문 밖을 나와 걸으면 중세시대의 사람이 된 것처럼 아주 오래전 탈린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여행지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을 좋아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로부터 만들어진 것처럼 여행지의 역사에 대해 알면 지금 그곳이 왜 그런 문화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현지인들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래서 나는 탈린의 올드타운 안에 자리 잡았다. 잠시 머무는 여행지라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단순히 보고 맛보고 즐기는 것 이상의 인사이트를 얻어갈 수 있다.



에스토니아에 머물며 나는 에스토니아와 한국의 평행이론을 발견했다. 

바로 두 나라 모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은 나라이기에 주변 열강의 침략과 지배 그리고 관심과 영향을 꾸준히 받았고 그로 인해 전쟁 등과 같은 피해를 많이 보았지만, 그런 침략과 지배를 꾸준히 나라와 시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맨 처음 에스토니아의 역사를 알게 되었을 때,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에스토니아의 독자적인 문화를 펼쳐보려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이미 외부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다. 석기시대부터 에스토니아에는 토착민들이 살았지만, 그 침략과 지배의 역사는 13세기부터 1991년까지 약 7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에스토니아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하며, 발트해를 끼고 북유럽 그리고 밑으로는 동유럽, 오른쪽에는 러시아가 있어 샌드위치처럼 끼인 곳에 위치하는 나라이다. 유럽의 강국들이 바다를 통해 러시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갈 때, 러시아가 바다를 통해 유럽과 대서양 쪽으로 나아가고 싶을 때 거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북동유럽의 강국들과 러시아에 의해 끊임없는 간섭을 받아왔다.


13세기 초에는 그들이 세운 왕이 독일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영토의 일부가 덴마크에서 리보니아로 팔려가는 등 매우 원시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의 약탈과 전쟁이 지속되었다. 물론 해외 왕들과 귀족들에게 바칠 농수산물 및 자연광물을 채취하는 것도 에스토니아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한자동맹의 상인들이 들어와 문화와 상업을 꽃피웠으며, 이 시기에 지어진 탈린 올드타운은 지금도 중세 한자동맹의 위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후 15~17세기, 스웨덴과 폴란드가 지배했을 때는 군사적으로 많은 부분을 정비해 아직도 그 시기에 지어진 지하통로와 방공호가 남아있으며, 신성로마제국 시대부터 에스토니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독일은 현재 에스토니아에 남아있는 성당이나 교회의 첫 시작을 가져다주었다.

탈린 옛 시청사 건물과 상인들의 집합장소였던 길드 그리고 탈린 올드타운 내에 남아있는 교회


18세기 이후에도 에스토니아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독일과 러시아였다.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의 황족과 귀족들이 에스토니아를 지배했고, 법과 행정, 교육, 종교의 부분에서는 독일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에는 지금도 러시아 황제가 만든 궁전이 있고 발레를 즐겨 보는 등 건축물과 예술, 문화생활에 있어 러시아의 영향이 남아있다. 또한,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발트 3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교인 타르투 대학교도 독일 교육 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탈린에 위치한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이었던 카드리오그 궁전. 톰페아 언덕 위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 독일의 교육 시스템으로 학생들을 교육 시켰던 타르투 대학교.

하지만, 세계 1차 대전 이후로 에스토니아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쟁터가 된다. 독일의 나치즘과 소련의 공산주의 군대들에 싸워 1920년 잠시 독립을 이루지만, 약 20년이 지나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할 무렵 소련과 독일 사이의 협약으로 에스토니아는 소련에게 강제 점령당한다. 이 시기에 에스토니아인들은 강제 징용과 이주를 당한다. 3만 명이 넘는 에스토니아인, 특히 남자, 유대인, 토착민들이 러시아의 수용소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되고, 절반 넘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세계 2차 대전 내내 소련과 독일에게 짓밟힌 에스토니아는 항구는 물론 절반 가까이의 산업과 사회기반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에스토니아의 인구는 20% 가까이 감소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로도 에스토니아는 소비에트 연합국에 속해 공산주의 국가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오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1991년에서야 제대로 된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1920년 에스토니아의 첫 독립을 기념하고 독립운동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탈린의 자유광장


현재, 에스토니아는 끊임없이 러시아와 군사나 영토 문제로 대립 혹은 조율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들의 독립에 도움을 준 북유럽의 나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발트 3국인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함께 협력하여 사회 경제적 시스템의 발전과 연계를 도모하고 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8세기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그때부터 에스토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그들만의 문화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는데, 에스토니아어 교육을 강화하거나 주변 열강들에 의해 융합되어 발전했지만 독자적인 특성을 가진 문화에 대해 연구와 보존을 계속해왔다.



이런 에스토니아의 긴 스토리를 에스토니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화 유적 시설 등을 돌아다니며 보고, 에스토니아 현지인들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들으니 무엇인가 한국의 중국, 일본과의 관계, 중국 왕조와 왜구 그리고 몽골의 침략,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등 한국의 역사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와 오버래핑되는 부분이 많았다.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이것이 지리적 유리함을 갖춘 나라의 숙명인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1991년부터 자유주의 국가로 독립을 이뤄 30년 만에 빠른 성장을 이룬 에스토니아가 작지만 강인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에스토니아에 오기 전, 에스토니아가 그저 북유럽 그리고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에스토니아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나는 에스토니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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