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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닥쓰담 Aug 24. 2020

감정 쓰레기통

#17  나는 어떤 성향인가? : 사고형/감정형


사고형이냐 감정형이냐 구분을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오해가 바로 ‘감정형은 착하다’라는 것이다. 자기 배우자가 밖에서는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데 집에 와서 가족한테는 1도 착하지 않다며, 절대 감정형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감정형은 착한가? 아니, 원래 착한 사람이 있을까? 잘 지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 관계가 불편해져도 상관없는 쪽보다는 불편한 관계를 힘들어하는 쪽이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더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감정형은 관계중심적이고 사람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잘 웃고 환대하고 호의를 잘 표현하고… 감정형의 행동이나 태도에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제스처가 장착되어 있다. 



감정형은 허용적이다. 좋은 관계 또는 잘 지내고 싶은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약속을 좀 어겨도 양해해주고, 불편이나 손해를 감당해준다. 감정형은 이렇게 ‘경계를 허무는 정도’를 친밀감의 척도로 여기기도 한다. 친한 사이에 꼬치꼬치 따지고, 따박따박 계산해서 받는 것을 감정형은 불편해한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면 상대방도 역시 양해해줄 것이라고 믿고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경우가 있다. 그랬다가 상대방이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 당황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감정형의 허용적인 특성은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감정형이 대립이나 갈등을 피하려고 감정을 받아주고 상대의 의견에 따라주는 것을 상대방은 ‘이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괜찮다니까 계속 그렇게 해도 괜찮은 줄 알고, 감정형이 양해하고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승부를 가리려는 경향이 있는 사고형이 보기에 (특히 조직이나 비즈니스 관계와 같은 스포츠판에서는) 매번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좋다’고 하는 감정형은 한 수 아래로 접고 대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오해가 오래 지속되다가 감정형이 어느 순간 허용을 거둘 때는, 원만하게 관계가 재조정되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받는 사람은 원래 그런 줄 알고 받았고, 주는 쪽에서는 허용이었을 때 그렇다. 



감정형의 허용적 태도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더 큰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감정형과 일대일 관계일 때 그 상대방에게 감정형의 허용적 특성은 장점일 수 있지만, 다른 관계와 얽히면 그 특성이 단점이 돼버린다. 예를 들면, 잘 받아주고 물러서주는 감정형 남편은 평소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남편이지만, 본가하고만 얽히면 그렇게 ‘바보 멍청이’일 수가 없다. 딱 잘라 거절을 못 하고 “엄마, 이거 어떻게 해요?” 하는 어린아이처럼 난처한 얼굴로 아내를 쳐다본다. 이럴 때마다 아내는 불 뿜는 용이 된다. 

“왜 싫다고 말을 못해!”


감정형은 일대일 관계에서는 내가 양보하고, 남하고의 관계에서 ‘내 편’과 ‘상대편’이 부딪칠 때는 나와 한덩어리인 ‘내 편’이 빨리 양보하고 충돌 없이 넘어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감정형의 ‘내 편’인 사람은 덩달아 손해를 입게 된다. 

누구한테 싫은 소리 못 하고, 남한테 피해 끼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처럼 보인다. 공감을 잘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감정형의 특성상, 자기 입장보다는 가족의 입장을 먼저 배려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다. ‘남’하고만 얽혔다 하면 가족에 대한 배려는 뒷전이 되고 ‘남을 배려하는 자기 입장’을 앞세운다. 이런 모순 때문에 감정형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감정형 중에는, 밖에서는 세상 친절하고 상냥한데 자기 가족에게는 퉁명스럽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밖에서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태도로 살고 집 식구들한테는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까칠하게 군다면, 이 사람은 평소에 밖에서 주변 사람들의 감정 쓰레받기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루종일 직장 사람들이나 친구들의 감정 해소를 허용적인 태도로 다 받아내고, 그걸 그 사람들에게 돌려주지도 못하고 어디 딴데다 쏟아버리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집으로 갖고 들어와서는 집 식구들을 감정 쓰레기통 삼아 거기다가 털어내는 것이다.

반대로 집안에서 다른 가족들의 감정 쓰레받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 다른 대상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집에서는 세상 착하고 온순한 아이가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를 정서적으로 괴롭히기도 한다. 

집에서 가족들, 특히 부모의 감정 쓰레받기 역할을 하면서 자란 사람이 사랑하는 연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자기 감정을 받아주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는데, 자기는 가족으로부터 받아낸 감정 쓰레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 누가 받아주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거기다 쏟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감정형에게는,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안전기지와도 같은 관계가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포츠판에서 뛰는 운동선수(사고형)의 경우는 같이 땀흘리는 동료들과 더불어 동료애를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이라 해도 운동을 열심히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처럼 오순도순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감정형)은 정서적 안정감과 친밀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만약 가족 중에 그런 대상이 한 명도 없다면 밖에서라도 친구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취약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감정형에게 그 친밀한 관계란 소중함을 넘어서서 ‘없으면 안 되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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