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dricshafen의 추억 vol.35
한번 올 때마다 적어도 유럽 3개국 7개 도시쯤 들러야 하는 바쁜 일정에 하루 300km 이상은 꼬박 운전을 해야 하는 출장 코스에는 으레 발음조차 생소한 도시들이 꼭 한 두 곳은 포함되어있기 마련이지만 Friedricshafen은 한 번 보고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독특한 철자를 가졌다.
뮌헨에 가면 뮌헨 맛집, 프랑크프루트에서는 프랑크프루트 맛집, 스투트가르트에서는 스투트가르트 맛집을 찾아 다니며 트립어드바이저를 보고 미슐랭가이드를 보거나 때로는 론리플래닛에 나온식당을 가 보는 게 출장지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대게 그런 식당들은 한 끼에 50유로가 훌쩍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두달전에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주문조차 불가능한 부지런한 사람들을 위한 곳 이었기에 긴박하게 진행되는 출장 일정 중 방문에 성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출장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장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출장 중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항상 맛집을 찾는 움직임으로 분주 했다. 출장지에서 나의 모습은 국내 여느 여행지를 방문했을 때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그 여행지의 유명한 맛집을 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면 왠지모르게 뭔가 손해본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내게 식당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던 일화가 있었다. 당시 출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오랜기간 일을 했던 기술고문 요한 고문과 함께 가게 되었다. 기술분야에서 평생을 일하며 길러진 그의 관록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냈지만 꼭 전문분야가 아니더라도 대화 속에 묻어나는 삶에대한 깊은 통찰과 배우고 싶은 그의 인생관은 이미 중년이지난 멋진 어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존경심 같은 걸 자아내곤 했다.
요한 고문과 같이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기뻤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그와 출장을 간다는 건 그 지역 전문가와 함께 출장을 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출장은 미리 맛집 검색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 하고 떠나기 전부터 이미 머릿속에 현지의 유명한 식당에서 만나게 될 멋진 테이블 위의 식사를 기대했다. 그러나 바쁜 출장 일정으로 인해 맛집은 커녕 이동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겨우 끼니를 겨우 때우는 정도에 불과 했고 맛집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Friedricshafen에서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점심, 이동 중 시간이 생겨 잠깐 여유있는 점심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자 바로 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한, 이 근처에 유명한 식당이 있을까요? 제가 트립어드바이저를 검색해봤는데 여기여기가 점수가 높네요.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괜찮아 보여요. 여기로 가볼까요?"
그러자 그는 "응 거기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데 괜찮다면 이 앞에 있는 식당으로 가면 어떨까?" 하며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을 가리켰다.
차로 이동하는 게 부담스러워 가까운 곳에 가자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요한에게 말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이동시간이 얼마 안 걸릴 것 같아서 점심은 조금 여유있게 먹어도 될것 같아요. 근처 식당보다는 좀 더 유명한 식당으로 가면 어때요? 이동네 식당들은 다 작고 이름도 없는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좀 특별한 식사를 하고 싶은데" 그러자 요한이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응 맞아. 네가 검색한 그 곳도 아마 10점 만점 중 8점 이상은 충분히 줄 수 있는 곳일거야. 하지만 유명하고 큰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것과 이곳의 작은 식당이 줄 수 있는 느낌은 정말 다르거든. 너도 아마 만족할거야. 그치만 그 식당에 가고 싶다면 얘기해 그쪽으로 가도 되니까."
유명하고 큰 식당과 작은 동네에 있는 이름 없는 식당이 줄 수 있는 차이, 생각해보니 이 작은 식당들은 또 다시 와보긴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요한이 이야기한 곳으로 가보죠. 저보다는 전문가니까. 나는 당신을 신뢰하니까요."
그렇게 도착한 식당이 바로 이 곳이다. 허름한 외관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식당인지 모르고 지나칠만한 곳에 작게 오늘의 메뉴와 가격이 쓰여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재미있는 그림들이 연도순으로 벽에 나란히 걸려서 우리를 맞았다. 비슷하게 생긴외모와 그림 아래 적힌 이름을 보면서 그림속 주인공들이 식당의 역대 주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눈으로 마치 외지에서 온 나를 의심어린 눈초리로 훑어보는 듯 했다. '음, 어디 우리 식당에서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한번 보지' 라고 생각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정갈한 테이블과 과하지 않지만 신경을 쓴 듯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집 주방에 들어와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점심으로 가볍게 샐러드를 주문했는데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샐러드를 내앞에 내올 때 풍기던 향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평범해보이는 상추를 무심하게 뜯어서 레몬과 오렌지, 토마토로 상큼함을 더하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치킨을 올리고 생블루베리를 한줌 가득 뿌려 한입 먹을때마다 기분 좋은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마지막으로 뿌린 통후추가 향긋하게 코끝에 남는다. 한입 두입 먹다 보면 구운 버섯이 나온다. 부드럽게 이 모든걸 어우르는 드레싱은 과하지 않게 그저 이들을 감싸고 있었는데 재료 각각이 서로 어우러지는 느낌이 좋아서 드레싱 없이도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중간중간 드레싱이 입안에서 맴돌며 침샘을 자극한다.
요한이 웃으며 어땠냐고 묻는다. 한입 한입 먹는 내내 감탄사를 내뱉던 나는 마지막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며 지금까지 출장 중 먹었던 가장 맛있는 식사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식당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언제 와본적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요며칠 이 근처를 지나면서 눈여겨 보았는 데 그날 그날 새로운 메뉴를 준비하기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라며 "유명하고 큰 식당들은 음식의 스타일이나 맛이 일정 수준 이상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기때문에 맛이 표준화 되어있고 그 수준에 머무르곤 해서 크게 기대를 져버리지도, 기대를 넘어서지도 않거든. 그래서 실패하면 안되는 중요한 자리에 적당하지. 하지만 이렇게 동네의 작은 식당도 그에 못지 않게 대부분 기대를 만족시키고 때때로 크게 기대를 넘어 서곤 하는 데 그때의 만족감이 참 좋아.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 가는 느낌 이랄까. 물론 지갑이 가벼워 질 일도 없지." 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 처음엔 기대를 안해서 더 맛있게 느껴지나? 하고 생각했는데 기대와 무관하게 너무 맛있어서 놀랐어요. 그리고 앞으로 이 식당은 Friedricshafen에 대한 기억과 함께 굉장히 특별하게 기억 될것 같아. 고마워요."
그 이후로도 새로운 지역에 가면 여전히 트립어드바이저와 미슐랭가이드를 검색해 보지만 검색의 빈도가 줄었고, 다른 사람의 후기를 검색해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보다는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 가며 도전과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좋은 평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것 또한 뿌듯한일이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위험부담과 실패의 확률을 줄이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누군가의 발자국을 찾고, 따라가기도 하고, 그 발자국을 찾기 전에는 선뜻 새로운 땅으로 발을 내딛기 망설여 지는. 내 발 아래 이미 나있는 발자국을 찾느라 주변의 꽃과 나무, 바람과 햇살을 때로는 그냥 지나 치게 되는.
맛있는 식사와 함께 많을 생각을 하게 되었던 Friedricshafen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