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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Oct 22. 2021

셋이 합쳐 200살-고령가족 여행기(8/10)

#8. 꼼포스텔라를 향해 

DAY 14 6월 9일 08:00 리바디소Ribadiso - 오피노O Pino (16km/도보) 


함께 묵었던 사람들은 새벽같이 길을 나섰고,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오늘 산티아고까지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라 갈 길이 멀고, 우리는 며칠에 나눠 걷기로 해서 여유가 있었다. 

햇볕을 머금은 숲길, 2019


원래는 종착지를 남겨 두고 100 킬로 전 지점에 있는 사리아Sarria 부터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을 좀 더 드라마틱한 기분으로 입성하려 했으나, 묵시아Muxia와 피스테라Fisterra까지 돌아보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면서 42킬로 지점인 리바디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뒤로 순례객들이 부쩍 많아졌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이 길의 아름다움을 쉽사리 헤치지는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에서 잊지 못할 풍경을 남겨 주기로 작정한 것인지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이제와서는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던 햇빛, 신선한 흙냄새, 마른 잎과 새로 돋아난 푸른 잎의 어울림,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공기, 수풀 사이로 부는 바람, 그런 것들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이다.   


DAY 15 6월 10일 08:00 오피노O Pino - 오페드로조O Pedrouzo (5.2km/도보)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제 거의 1미터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걷고 있는 느낌이다. 단체로 걷고 있는 많은 스페인 학생들을 볼 수 있는데,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있다 보니, 날씨 좋은 주말 청계산에 오르고 있는 것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카페들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오페드로조는 꽤 큰 마을이고 알베르게도 많았는데, 순례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기가 꽤 많은 지역인지 건물 이곳저곳에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우리가 예약한 펜션도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모양이었다. 


주인장은 젊은 남자로, 최근에 이곳으로 이주해서 펜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순례가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 가까울수록 물가와 숙박이 비싸지고 있었는데 현실 감각도 살아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역시 답은 부동산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예약한 펜션(Pension 9 de Abril, 50유로) 근처에서 순례자 코스 메뉴(12유로)로 저녁을 먹었다. 큰 식당이 가득 찰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모두 내일이면 끝나는 이 여정이 아쉬워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인심 좋은 식당은 엄청난 양의 음식과 와인을 제공하고, 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집을 떠나온지는 3주가 다 되어가고 길 위에 선지는 2주가 넘었다. 그러나 아직 그리운 것은 없었다. 


{이후 1년이 지난 어느 연휴 전날, 나는 이 펜션에서 내 카드가 결제 되었다는 문자를 받게 된다. 자다가 봉창 맞은 나는 카드사에 전화를 걸고, 급기야는 펜션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지르게 되는 사건이 발생 한다. 북킹닷컴은 고객의 신용 정보를 지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스스로 데이터 관리를 잘하자!!} 


DAY 16 6월 11일 07:00 오페드로조O Pedrouzo -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 묵시아Muxia (18km/도보- 75km/버스)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이 길의 종착점을 향해 간다. 오늘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묵시아로 가는 버스를 탈 것이고, 묵시아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었다. 


5시간을 걸어 시내로 들어왔다. 성당 근처는 골목골목 사람들로 넘쳐난다. 오늘 도착한 순례객들과 어제 도착해서 이제는 관광객의 모습을 한 순례객들과, 그냥 관광객들과, 학생들과, 호객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거리는 흥미로운 텐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성당 앞 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길이 끝났다고 메달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광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무너지듯 성당 앞에 앉아 한 참을 그렇게 성당을 바라 보고 또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의식을 치르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어디론가 가 버리는 것이다. 


무언가가 허무하게 끝나고 시작되어 버렸다. 아 좀 더 나 자신을 혹독하게 다뤘어야 했나. 생각보다 감흥이 없어 약간의 후회가 일렁거렸다. 조금 건강해진 것 같고, 몸뚱이가 좀 가벼워진 느낌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다. 


싱겁게 종점을 지난 우리는 내가 좋은 리뷰를 확인해서 찾아간 라면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는데, 나는 사람들이 30일 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거나 넓은 아량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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