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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Oct 22. 2021

셋이 합쳐 200살-고령가족 여행기(7/10)

#7. 오늘의 꼰대도 지나갑니다. 

DAY 11 6월 6일 08:00 부르고스Burgos  - 폰페라다Ponferrada (286km/기차) 


다시 길 위에 섰다. 1시간을 걸어 부르고스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부르고스 역은 시 외곽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있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걸어갔지만 시내와 역을 연결하는 버스들이 많다. 이제 남은 일정은 8일 정도. 


조금 더 멀리 가야 한다. 새마을호 같은 느낌의 낡은 기차를 타고 3시간을 달린다. 창 밖으로 넓은 보리밭이 펼쳐지고,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순례객들이 보인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저 길을 걷고 있을까. 

비와 함께 걷는 어머니와 아버지, 2019


기차역에 내려 예약한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다시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멋진 다리를 건너 템플 기사단의 성을 왼편으로 두고 그 길의 끝에 다다르면 알베르게 기아나Albergue Guiana (13유로)에 도착한다. 규모는 큰 편이고 깨끗하며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폰페라다는 꽤 큰 도시로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함께 방을 쓰게 된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온 유쾌한 60대 여성분은 시작 지점부터 여기까지 걸었더니 이제 그만 걸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비슷한 풍경을 보며 걷는 것도 이제 지겹단다. 깨달아야 할 것도 다 깨달았다고 한다. 오늘로 순례길을 멈추고, 남아 있는 3주 동안은 바닷가에서 와인이나 마시다 돌아가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크리덴셜에 도장을 받는 것에 집착한다. 도장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고, 이런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도장을 찍어주는 곳도 있다. 수요와 공급이 명확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 길에 서 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다닌다는 이유로 한국 사람들만 만나면 '효녀' 소리를 들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효녀' 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갈수록 익숙해졌다.     


DAY 12 6월 7일 08:00 폰페라다Ponferrada - 루고Lugo (111km/버스)


오늘의 일정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걸어서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조Villafranca del biezo까지 갈 것인가. 이 지역은 '스페인 하숙'이라는 TV프로에 나왔던 지역으로 갑자기 핫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아니면 오 세 브레이로 O Cebreiro로 갈 것인가.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바로 그 석양이 아름다운 마을. 아.. 나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효녀일 뿐이다. 그러나 도저히 오 세이브로로 가는 루트가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스페인 하숙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페인 골목 식당 메뉴 2019


버스 루트를 확인하고 아예 프랑스 길에서 벗어나 포르투갈 길에 있는 루고로 방향을 잡았다. 계획했던 프랑스길에서 벗어난 다는 것 만으로 왠지 여행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루고도 포르투갈 길에서 매우 큰 도시로 알려져 있고 문어요리pulpo로 유명하다. 거대한 성곽을 따라 걸어 성 안쪽에 자리 잡은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숙소에 짐을 놓고, 근처의 음식점으로 간다. 숙소를 잡고 처음 하는 일은 앱에서 음식점을 확인하는 일이다. 음식점들을 맵 위에 모두 표시해 놓고, 가까운 곳부터 리뷰를 확인해 보는 식으로 하는데, 별로 실패가 없었다. 


사실 맛보다는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스페인 음식점들은 오후에는 쉬고 늦게 다시 문을 연다. 우리처럼 아침에 활동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고령 가족) 걷는 사람들'에게는 8시 30분으로 저녁 시간을 맞추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미 내가 지도를 펴 놓고 앉아 졸고 있을 시간 이기 때문이다.   


오늘 갔던 식당은 숙소가 있는 골목에 있던 작은 식당으로, 열정적인 주인이 음식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고 서빙까지 직접했다. 오늘 온 생선은 어디서 온 것인데 어떻게 요리를 했냐 하면은, 블라블라...


신이 난 나는 메뉴에 있는 음식을 거의 다 시켜서 먹어 보았다. 신선한 재료를 쓴 해산물은 뭐 그냥 맛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많이 걷지도 않고 이렇게 먹기만 해서 되나 싶었지만 맛있게 먹으면 0 칼로리라고...... 어디서 들었다. 


DAY 13 6월 8일 08:00 루고Lugo - 멜리데Melide - 리바디소Ribadiso (51km/버스-15km/도보) 


루고에서 일찍 버스를 타고 나와 멜리데까지 왔다. 프랑스길로 재 진입한 것이다. 오늘 계획은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리바디소로 걸어가는 것이다. 멜리데도 문어 요리로 매우 유명하고 아침부터 한국 순례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문어 요리를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내를 지나쳐버렸다. 시내의 끄트머리에 있는 식당에 간단한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는데 이미 많은 할아버지들이 흥겹게 한잔 하고 있다. 토요일 오전 11시였다. 


주인아저씨가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통에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한잔 해야죠! 


그 식당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맛 보여 줄 모양이었다. 식당에 등장한 외국인을 보고 신이 난 것인지 자기 흥에 한 껏 취한 아저씨는 나를 주방으로 불러 셰프와 인사를 시켜 주고, 거기 있는 모든 식재료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갑자기 분위기 스페인 요리 단어 공부. 


손님들과도 인사를 했다. 저녁시간에 왔으면 저 장단에 맞춰 내가 춤을 춰 줬을 텐데. 너무나 아쉽지만 우리는 지금부터 15킬로를 더 걸어가야 한다. 그곳은 아마도 돼지 도가니 찜 전문으로 현지 단골들을 주로 상대하는 식당인 것 같았다. 다음에 꼭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을 하고 부엔 까미노를 외치면 식당을 나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리바디소에서는 작은 알베르게Albergue Milpés에서 묵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꼰대의 정수를 만났는데, 자신을 교수라고 지칭한 이 60대 남자분은 누구에든 가르침을 주기 위해 안달 나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어김없이 나는 또 효녀 소리를 듣고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이 결혼을 하지 않아 걱정이다."라고 앓는 소리를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교수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으려고 하는 20-30대 젊은 세대의 '무책임함'에 대해 울분을 토해냈다. '우리 때는 말이야'의 일장 연설이 다시 시작될 때  나는 "저는 40대인데요"라고 하며 쉽게 그 자리를 모면해 보려 했으나, "늦지 않았어요, 좋은 인연 만날 거예요.", "기술이 좋아요. 임신할 수 있어요"하는 뜻하지 않는 파이팅과 원치 않는 축복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는 여기서 깽판을 칠까 말까 고민하느라 가슴이 벌렁 벌렁거렸다.  


어떤 날의 컨디션, 기분 또는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것들, 돌아보면 사실 매우 사소로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샤워시설이나 베개, 숙소의 온도, 대화를 나누게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좋든 나쁘든 오늘이 지나면 지나가고야 만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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