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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Sep 27. 2019

나의 강아지, 나의 아찌

 함께 였던 소중한 날들과 네가 없는 보통의 날들 

2002년 뜨거웠던 월드컵의 계절이 끝나고 아찌가 왔다.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3주가 지난 아기 강아지. 첫눈에 아찌에게 홀딱 빠진 우리 삼 남매는 서로 자기 방에서 아찌를 키우겠다고 막장 싸움을 벌였고, 아찌의 거처는 중립지역인 거실에 마련되었다. 


어머니는 똥도 한번 안 치우는 것들이 생쑈를 하고 있다며 전에 없는 타박을 하셨다. 똥오줌을 못 가리는 아찌를 교육시키기 위해, 둘째가 거실에서 먹고 자며 배변 훈련을 시켰다. 내가 막 취직하여 돈맛을 들이고 있을 때, 한낱 대학생에 불과했던 동생들은 강아지 박사로 거듭났다. 


아찌는 그 뒤로 천방지축 못 말리는 강아지로 잘 자라서, 가뜩이나 술 쳐 먹고 다니는 삼 남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인 어머니에게 새로운 차원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렇다. 3대 지랄견으로 악명이 높은 그 슈나우저이다. 나는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서는 아찌를 붙들고 사장 욕도 하고 과장 욕도 하면서 직장생활의 비애를 떠들어댔고, 아찌는 흥흥 대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10년이 지나 우리 삼 남매가 모두 독립하고, 집에는 부모님과 아찌만 남았다. 아찌도 나이가 들었지만 마음만은 젊은지 김치도 훔쳐먹고, 고구마도 훔쳐먹고 벽지도 찢어 놓는 등 망나니 짓을 계속했다. 모임에 간 어머니는 다른 친구 분들이 손주 자랑 타임을 가질 때, 얼른 아찌 사진을 꺼내 들고 정신승리를 이뤄냈다. 부모님 곁에 있는 아찌가 왠지 든든했다. 

조카와 아찌,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2016

결혼한 둘째가 아이를 낳았고, 조카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찌도 이 새로운 생명체에게 무척이나 흥미가 있는 듯했다. 이 작은 것들은 서로 다른 종인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눈높이를 가지고 있고, 사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집안 곳곳을 몰려다니며 깽판을 쳤다. 


부모님 집 도어록을 누르기 시작하면 이미 아찌가 문 앞까지 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나오지 않았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아찌가 "이제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할까 봐 조바심이 나서, 아찌 눈을 보며 열심히 춤도 추고 박수도 쳤다. 아찌는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주제에 헛짓 그만 하고 간식이나 내놓으라고 했다. 


아찌가 암에 걸린 것은 재작년이다. 이후 1년을 투병하며 2번의 수술을 거쳤다. 첫 번째 수술 후 경과가 좋아 방심한 것이, 재발하는 데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16살 노령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한 것이 애당초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아찌의 투병이 계속되었고, 그렇게 사십 줄 삼 남매를 부모님 집으로 불러 모았다. 


어느 날 밤부터 아찌가 잠도 이루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병원에 가서 수액도 맞고, 입원도 시켰지만 진전이 없었다.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수의사 선생님과 긴 상의 끝에 안락사를 결정했다. 


그렇게 일정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찌의 상태가 어째 다시 좋아진 것 같았다. 아찌가 혼자 물도 먹고 화장실도 갔다. 뭐야, 아찌. 걱정했었잖아. 다시 살아난 거야? 아찌는 병원에 다녀와서는 집안을 이리저리 쏘 다니더니, 다시 뻗어서 신음소리를 냈다. 가족들도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찌를 지켜보았다. 


2018년 5월 4일 오전 11시, 동생과 아버지가 아찌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지금도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강아지 치고는 오래 살았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수의사 선생님이 함께 울어주었다. 1년이 넘게 우리 식구들을 상대하느라 고생한 고마운 분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아찌가 좋아하던 집 앞 공원에 가서 아찌의 뼛가루를 조금 뿌려주었다. 아찌의 유골함은 내가 혼자 사는 집으로 가져왔다. 가끔 아찌야 아찌야 하고 크게 불러본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해보지만 대답은 없다. 믿는 자에게는 보인다더니, 도대체 얼마나 믿어야 되겠니. 아찌교라도 만들어야 되겠니.


조카가 가끔 아찌 어디 갔어? 하고 묻는다. 그럼 우린 공원에 가서 또 아찌야 아찌야 하고 같이 불러 본다. 새가 울 때는 아찌가 새가 되었다고 하고, 매미가 울 때는 아찌가 매미가 되었나 봐 라고 얘기해 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믿어주는 조카에게 위로를 받는다.


아찌야, 네가 보고 싶은 날은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니다. 어느 보통의 날, 책을 보며 앉아 있다가, 밥을 먹다가, 전철을 기다리다가 아무 이유 없이 문뜩 네 얼굴이 떠오른다. 네가 없는 삶에도 어느새 적응이 되고 있나 보다. 이 악착스러운 적응력이 징글징글하다. 하지만 그래서 살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우린 어김없이 또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우린 원래 끝을 모르는 사람들이지 않니. 네가 보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Image by Gloria Fernández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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