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리 Sep 02. 2019

5살 조카와 공주 이야기   

오늘도 평화로운 조카의 의식 세계와 이모의 하루 

5살 조카가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개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넣을 수만 있다면 눈에 넣어 놓고 싶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제 엄마를 따라 나를 언니라고 불렀던 조카가 이제는 5살이 되어서 그 조그만 입으로 '말이 되게' 말을 하고, 김치도 먹고, 문 닫고 화장실에 들어간다. 인류의 진화를 목도하고 있는 듯한 신비감이 밀려온다.  


조카의 덕질은 우리 집에서 유명하다. 뽀로로, 콩순이, 타요버스, 폴리를 지나 겨울왕국에서 정착하는 듯했으나, 시크릿 쥬쥬로 옮겨 갔다가, 현재는 디즈니의 모든 공주들을 사랑하고 있다. 이 무더위 속에서도 5중 레이스를 겹겹이 두른 나일론 엘사 드레스를 입은 조카의 모습이 안쓰럽다. 한겨울 미니스커트 차림의 나에게 "멋 부리다 얼어 죽는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 여동생은 어렸을 때 유치원 원복인 치마를 입지 않겠다고 깽판을 부렸다. 아침에 억지로 치마를 입혀 보내도 돌아올 때는 자랑스럽게 하얀 스타킹에 상의만 입고 있었다고 한다. 질겁한 어머니가 바지를 맞춰줬다. 자라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동생은 무채색과 세련된 심플함을 즐긴다. 그녀의 딸내미인 나의 조카님은 꽃분홍과 과도한 레이스의 앙상블을 사랑한다. "안 맞아, 안 맞아" 오늘도 신경전이 벌어지지만, 고집 센 딸이 벌거벗고 다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 어미를 꼭 닮았구먼. 


유나야, 오늘도 너의 반짝, 아니 번쩍 번쩍이는 구두와 네 얼굴 만한 목걸이 때문에 이모는 눈이 멀 뻔했다. 이것은 내 노안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만,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은 내 몫이더구나. 너는 나에게도 그 목걸이를 걸어 보라고 했다. 나는 책에서 배운 "웃으며 거절하는 법"을 너에게 써먹어 보려고 했지만, 너는 배움이 없는 사람. 대화는 사치일 뿐이었다. 

디즈니의 공주들은 나도 잘 아는 분들이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인어공주. 모두 내가 어렸을 때도 잘 나가는 공주였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초중고 교가는 가물가물하지만, 신데렐라의 노래만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유아기적 각인이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이 공주들은 죄다 누구나 한번 보기만 하면 홀딱 빠져 버리는 절세 미녀들이고, 마음씨 곱기가 마더 테레사 급이지만 보통은 가정환경이 좋지 않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상처 받았거나, 버림받았거나, 가난에 찌들었거나.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도 긍정적 에너지와 탁월한 외모로 '왕자'와 결혼해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지금도 연속극들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써먹는 이야기의 원형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왕자가 실장님이나 재벌 2세 후계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조카가 이런 옛날 공주 이야기 클리셰에 빠지는 것이 싫다. 동화책을 읽어 줄 때마다 조카에게 "이런 건 현실에 없어. 마차도, 무도회장도, 왕자도, 마녀도. 이런 건 2차원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뿐이야. 절세미녀가 될 필요도 없어.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야 해.", "이건 너에게 쓸데없이 비싼 엘사 팬티를 사게 하려는 디즈니의 음모일 뿐이야." 이렇게 길게 사족을 덧붙이며 신여성 이모로서 올바른 사고방식을 전달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대화는 순조롭지 않다. "왜"병에 걸린 조카가 연신 "왜?" "왜?" "왜?"를 해 대는 통에, "아... 그래 왕자랑 결혼해버려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인내심이 문제다.  

조카가 색칠한 자스민 공주 2019

알라딘을 보고 온 조카는 '자쯔민' 공주의 팬이 되었다. 드레스가 너무너무 이뻤다고 한다. 알라딘 색칠하기를 한다. 알라딘 책도 매일 읽어 달라고 한다. 어찌나 글자가 많은지 한번 읽으면 진이 다 빠진다. 알라딘은 조금 스토리가 다른데, 결혼하라고 성화인 아버지에게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거에욧"하고 당당히 말하는 자스민 공주의 캐릭터 때문이다. 아, 이거 30대 초반의 나랑 비슷하군. 그런데 우리 아빠는 술탄이 아니고,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엔 요술램프도 없고 지니도 없었지. 요술램프와 지니가 없는 알라딘은 가난해서 빵을 훔칠 수밖에 없는 레미제라블한 사람 남자다. 일반 남자가 왕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법이 필요하다. 


알라딘을 한 자리에서 세 번 읽어주고 "또 읽어줘"의 지옥에 빠진 나는 화제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 작은 사람들은 도대체 반복의 지루함을 모른다. 



우리 유나는 무슨 공주야? 무슨 공주 되고 싶어?
- 유나 공주 아니야 
그럼, 유나는 뭐야?
- 사람. 유나는 그냥 사람이야. 


나는 감탄했다. 조카는 가끔 너무나 현학적인 대답을 해서, 질문한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냥 사람"이라. 나는 이후에 "그럼, 사람이 뭔데?" 하고 철학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옳거니. 이때다. 얼마 전에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대충 읽은 나는 내 지식을 뽐낼 준비가 되어 있다. 조카는 "사람은 그냥 사람이야"라고 했다가 뜬금없는 똥, 방귀, 코딱지 타령을 이어갔다. 이 단어들을 나열하고는 또 지 혼자 낄낄대며 자지러진다. 각종 분비물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군. 한 시간에 한번 정도 똥 타령을 한다. 대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매 시각 34분에 똥 얘기를 하기로 계획한 모양이었다. 


조카가 "유나 영어 못해. 영어 배워줘"라고 말했을 땐 마음이 짠했다. 유나, 너는 한국말이라는 것도 잘 못하고 있다. 이건 공주들의 영향이다. 공주들은 어째 다들 영어 이름을 가진 백인 여자냐. 노래도 영어로 막 불러 대고. 콩순이에서 엘사로 넘어가는 이 괴리감은 도대체 무엇이냐. 시크릿 쥬쥬는 한국에서 만든 캐릭터 집합체이다. 그러나 한국산 공주 이름도 '이선영'일 수는 없다. 공주는 이름이 엘사이거나 라푼젤이거나 로사 정도는 돼야 한다. 이것은 카페 이름이 '이선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바리스타 이름도 폴 바셋이어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먹힌다. 


조카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배워갈 것이다. 저 엘사 드레스를 벗는 날이 오겠지. 아니 그걸 입고 쭉 늙어가는 조카를 상상해 본다. 놀이 공원에 취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공주보다는 공주병에 걸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왕자란 영국이나 아프리카쯤 가야 한 두 명 있는데, 네 할아버지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유나야, 2014년에 태어난 너의 기대수명은 86세이다. 아마 100세 이상은 거뜬히 살게 되겠지. 네가 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이모는 감히 장담할 수 없다. 네 세상은 내 세상 너머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유나야, 너는 삶의 정수가 똥 싸기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는 똥을 싸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단다. 배변 활동은 앞으로 네가 살아가면서 하게 될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똥 얘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산티아고 다이어리(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