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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Sep 07. 2019

역세권 백수 일지(1)

어디에 살 것인가 Wherer to live 

경제적으로 자립한 이후, 나는 전세인으로 살아왔다. 전세인은 일반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자신의 삶을 정리하게 된다. 부천-삼성을 10년 이상 오가며 지옥철을 견뎌온 나는 출퇴근을 걸어서 할 수 있는 곳에 집을 얻고 싶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도보로 30분 이내가 될 것. 그것이 집을 보러 다닐 때 내건 첫 번째 조건이었다.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며 조금씩 집을 키워갔다. 원룸 스튜디오에서 방 2개 아파트가 되기까지 4번 이사를 했다. 돈을 모으고 자산이 더 커진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 사이에 살림이 늘어났다.  


전세를 찾다가 얼떨결에 작은 집을 샀다. 전세난이었다. 결혼한 친구들이 슬슬 집을 사기 시작하던 그 해였다. 지금 사지 않으면 다시는 살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투자가치는 별로 없어도 평생 살 곳을 마련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겁이 많은 나는 혼자 은행에 가서 대출 상담을 받으며 무척이나 쫄았다. 결국 대출 이자를 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 들이닥쳐 새빨간 압류 딱지들을 붙여대는 상상을 하며 불면에 시달렸다. '사채꾼 우시지마' 같은 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다. 

집을 사고 40이 되면서 권태가 찾아왔다. 이 권태라는 친구와는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출근을 한다. 커피를 마신다. 점심을 먹는다. 퇴근을 한다. 허기진 배를 안고 돌아와 허겁지겁 저녁을 먹는다. 미드를 보다 잠이 든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온라인 쇼핑에 빠져 들었다. '1+1+1', '이 모든 것이 39900원', '단 오늘만 특가' 따위의 카피에는 개수작인지 알면서도 기꺼이 걸려들었다.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의 증명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내일도 오늘 같이 살다 늙어 죽게 되겠지.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지만 끔찍하군.' 새로운 것이 절실했다. 일단 주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보기로 결심했다. 줄곧 서울 강남에서 출퇴근을 하던 나는 이직을 하는 김에 강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차를 가지는 대신 역세권을 택했다. 조금 걸으면 지하철이 있고, 이마트가 있고, 영화관이 있고, 한강이 있고, 박물관이 있다. 가까운 곳에 남산이 있고, 서울 도서관과 시립미술관, 덕수궁이 있다. 최고의 입지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는 일상은 이사 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뿔싸. 뜻하지 않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정체성의 거의 모든 것이었던 '회사원'을 버리고, '서울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이로써 1000만 동료가 생긴 셈이지만, 고정적인 급여가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역세권 백수인 나는 대신 시간이 많아졌다. 내 일상은 조조 영화를 보고, 커피를 뽑아 한강으로 나가고, 남산을 오르고, 서울 도서관을 가는 것 등으로 채워졌다.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며 무더위를 견뎠다. 


이번 전세 계약은 내년 2월에 끝난다. 그 이후도 역세권에 백수로 남아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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