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아가 되었다. #8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집집마다 딸들이 갖는 특징이 있었다. 어린 아이어도 유독 딸들은 탁자를 닦거나 정리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남자아이들이 자동차 놀이를 하듯 여자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며 자라서 일수도 있으나 근거리에서 엄마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학습하는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어른들은 벌써부터 정리정돈을 한다며 착하다는 말을 하고 그 모습을 더 기특하게 여긴다. 어릴때부터 착한 딸이란 말을 자주 들었다. 시장에 따라가거나 심부름을 가거나 여기저기 마주치는 어른들은 “역시 딸이 있어야 돼”라는 말을 칭찬처럼 한다. 그 말을 듣는 보통의 엄마들은 뿌듯해하고 그 모습을 보는 딸은 칭찬으로 이해하기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마일리지를 쌓는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고 나면 뒤늦게 알게 된다. 그 말에는 딸이 엄마를 도울 수 있어서, 엄마의 짐을 덜어줄 수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겠느냐는 의미라는 것을. 딸이 살림밑천이라는 말은 그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과거 남존여비가 존재하던 시절부터 시골에서 농사를 위해 키우던 소처럼 딸이 집안에 일꾼으로 대체가능했던 관습이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것이다. 어릴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엄마가 된 사람들을 만나면 여전히 “역시 딸이 있어야 돼. 아들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어. 딸이 효도한다니까.” 라는 말을 덕담처럼 한다. 부모만 가스라이팅을 하는 게 아니라 아는 어른,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집단적으로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다. 칭찬으로 포장된 그 섬뜩한 말에 왜 딸들이 희생되어야 할까. 미래도 모르고 맛집의 리본처럼 평생동안 착한 딸이란 리본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살게 된다.
엄마들이 만나면 경쟁적으로 하는 자식자랑에서 결혼한 자식과 결혼하지 않은 자식의 부모는 입장이 다르다. 결혼한 자식은 좋은 직업의 배우자와 손주 등 자랑거리가 다양하지만 부모의 끝내지 못한 숙제 같은 자녀의 결혼을 완성하지 못한 부모는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얼굴도 모르는 남의 자식얘기를 한참 들었다는 엄마의 후기를 듣거나 친구가 월급을 타서 부모님에게 뭘 해드렸다는 얘기를 들으면 딸들에게는 어떤 미션이 생긴 것처럼 부스터가 작동한다. 일종의 효도 챌린지다. 친구들이 결혼하기 전에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 댁 가전제품을 바꿔줬다거나 백을 사드렸다는 이야기를 한다. 직장생활 초반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그런 딸이 되야겠다고 목표 삼게 된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챌린지에 성공할 확률이 높으니 착한 딸 콤플렉스가 발동되는 것이다.
'엄마에겐 딸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결혼보다 물질이 그나마 깨기 쉬운 레벨이므로 딸들은 경쟁하듯 그렇게 엄마를 챙기며 엄마의 자랑거리가 된 것을 보람으로 느끼는 시기를 거친다. 지금은 SNS와 온갖 매체로 전 국민에게 자랑하는 상황이니 이런 경쟁이 더 잘 보인다. 체력이 되고 인생이 잘 풀릴 때는 모든 것이 수월하고 화목한 가족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사람의 기운과 능력이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절정기가 있으면 침체기가 있는 것처럼 그 챌린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온다. 직장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결혼과 육아로 챙겨야 할 부분이 늘어나기도 하는 등 여러 이유와 함께 부모처럼 자녀도 나이가 든다. 스트레스 많은 세상에서 부모보다 더 빨리 지치는 자녀들이 등장하고 은퇴한 부모를 챙길 여력이 없는 자녀도 속속 등장한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의 본심을 알게 되는 건 남과의 사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가족도 포함된다. 돈이 없을 때는 부족해도 화목할 수 있지만 돈 문제가 생기면 가족도 원수가 되고 불행해질 수 있다. 다정한 모녀관계도 인생이 잘 풀리고 돈이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