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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팍팍할 때 무심코 보게 된 그림이나 동화책에서 뜻하지 않은 위로나 감동을 얻을 때가 있다. 많은 문장과 어려운 말로 채워진 어른의 책 보다 적은 글자, 혹은 말 없는 그림책이 큰 위로를 줄 때가 있다. 현실성과 거리가 멀더라도 동화 같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연휴 동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마음에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보았다. 이미 봤는데 또 본다는 것은 마음에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여러 번 봐서 전개와 대사도 알지만 가끔 찾아본다.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있지만 그래서, 동화 같아서 좋아한다. 아마도 아픈 사람이 많이 등장해 그런지도 모르겠다. 현실 세상은 다 멀쩡하고 행복한 사람들 속에서 나만 낙오된 것 같다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우울이 깊어지기 쉽다. 드라마에는 선한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나만 아픈 게 아니라 함께 아파서 덜 외로운지 모르겠다. 회차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슬픔 없는 사람이 없어서 동질감을 느끼는지도.
이미 익숙한 내용인데 한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김준완이 장거리 연애 중인 여자 친구에게 전화로 이별을 당하고 실의에 빠져 홀로 있는 상황이고, 다른 친구 넷이 식사 중에 말하는 장면이었다. 친구들이 안정원에게 ‘이제 혼자 살 때도 되지 않았냐고, 준완이네 집에서 독립하라’고 하자 ‘그러려고 했는데 슬픈 눈으로 나를 붙잡더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준완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애라고, 걔는 외로워서 절대 혼자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외로움이 많은 그가 연결되었던 여자친구와 끊어져 상실감에 허덕이는 그 장면에서 후드득 눈물이 터지며 혼잣말이 나왔다.
“나도 외로운데… 외로움 많이 타는데… 나도 누군가 필요한데….”
내 마음속 생각이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가끔 설움 속에 토해내는 그 말에 나조차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늘 습관처럼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외롭지도 않아.”
그런 때가 있었다. 외롭다는 감정을 모르고 혼자 사는 게 세상 편하고 좋았던 시절이. 그러나 사람이 평생 일관된 성격이나 취향으로 죽을 때까지 가는 게 아닌 것처럼 마음과 생각도 변할 수 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기운이 뻗치고 살만할 때는 그 마음이 계속될 줄 알았다. 이렇게 기운이 달리고 두려움이 커지고 마음이 맥을 못 추는 순간이 오게 될 줄 몰랐다. 지금의 나는 자립이라 믿었던 많은 시간이 고립으로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느낄 만큼 외로움에 휩싸여 있다. 자신 있게 내뱉었던 어제의 말들이 보란 듯이 나를 비웃는 시간을 살고 있다. 함부로 장담한 것에 대해 처절하게 응징당하는 기분이다. 너무 우울하고 때로는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설움에 눈물을 쏟아내는 순간의 끝에는 그럼에도, 제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서 바닥끝까지 가라앉는 중에도 잘 살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작은 소망 하나로 오늘 하루를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