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중학생일 때 처음 접한 후로 라디오를 좋아하게 되었다. 멀리 있는 누군가와 펜팔을 하는 느낌이랄까. 목소리만으로 상대의 얼굴과 성격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좋은 곡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 누군가의 사연에 같이 웃고 슬퍼할 수도 있어서 작은 방에 있어도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은 그런 상상에 방해가 되었다. 라디오를 듣다가 패널의 목소리 혹은 흘러나오는 노랫말의 주인공이 궁금하면 즉시 검색해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상상하는 시간이 사라지고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시대가 되니 라디오의 매력이 줄었다. 문자나 채팅으로 사연도 실시간으로 소개되는 시대는 기다림의 미학을 상실했다.
편지가 오가던 시절을 떠올리면 편지라는 실물보다 그 편지가 도착하고 상대가 읽고 답장을 보내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과 기대가 주는 감정이 소중했다. 기다림의 미학을 느끼고 그 시간의 설렘을 간직하고 싶지만 기술문명은 그런 마음을 빠름으로 대체했다. 사실에 근거한 사연도 각색되어 소개된다. 누군가는 선물이 목적이라 소개여부가 중요한 사람도 있고 사연으로 재테크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사연이 있는 그대로 소개되고 공감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한다. 라디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연을 오랫동안 써본 결과 대부분의 사연이 각색되었다. 청취자는 읽히는 대로 그것이 사실이라 믿지만 실제는 가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혼이 엄마로 둔갑되거나 내향인을 외향인으로 바꾸거나 배경 장소를 바꾸는 일이 흔했다.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환승하다 생긴 일’을 주제로 사연을 썼는데 방송엔 장소가 신도림역으로 바뀐다. “0호선을 갈아타러 급하게 내려가다가 그만…”의 내용은 그대로 소개되어 어떤 청취자가 실시간으로 댓글을 단다. “신도림역에서 0호선 환승하려면 올라가야 하는데…”하며 허위 사연을 썼구나 싶은 의심을 품는 일이 생긴다. 청취자는 원작자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방송국의 각색으로 생기는 오해가 많다.
글의 작성자는 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경우가 많아 사연 자체를 부정당한 느낌이 들어 쓸쓸했다. 문자 같은 짧은 사연위주로 소개되고 빠르게 진행되는 방송이 많고 긴 사연을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읽어주는 방송이 적어 감성적인 사람의 라디오 사랑에 위기가 생기지만, 그 안에서도 오아시스 같은 방송은 존재한다. 사연을 올리면 보통 며칠 이내로 소개여부가 결정된다. 청취자가 많은(협찬 상품과 비례할 확률이 많은) 방송은 사연채택도 경쟁이 치열해 소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들여 올렸지만 소개되지 않고 빠르게 결과가 확인되는 방송에 상실감이 드는 것은 글을 쓰는 순간엔 신춘문예나 수기공모하듯 노력과 시간이 들어서다. 방송사에겐 그저 사연하나일 뿐이지만 쓰는 사람의 마음은 아닐 수 있다. 이제는 전처럼 애써 사연을 쓰지 않는다. 사연소개가 글재주를 인정받는 것 같은 자기만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다 문득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떠오르면 사연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사연소개 코너가 있다. 팝을 즐겨듣지 않는 사람이라 관심 없을 방송이지만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코너는 좋아한다. 일단 길이가 A4 한 장은 넘어야 하니 사연이 길어야 한다. 사연을 각색하지 않는다. DJ가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을 절묘하게 한다. 사연이 드라마처럼 이미지화가 된다. 사연과 연결되는 팝송이 절묘하다. 다른 방송과 차별적인 것은 사연을 올리고 방송 여부가 결정되는데 한 달은 있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며칠 내로 방송되거나 사장되는 타 방송과 달리 내 사연이 소개되는지 한 달 후에나 알 수 있다. 인기 있는 코너라서 사연이 많기도 하고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는 점이 특별히 좋다. 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언제 올까 기다리는 마음처럼.
오랜 날을 기다렸는데 방송이 안 될 때도 있고 한낮 방송이라 일정에 치이다 보면 본 방송을 놓치기 쉬운데 다시 듣기가 없어 치명적이지만 그래서 추억의 라디오 같은 느낌이 든다. 방송사실을 당일에야 알 수 있어 사연자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 긴장감이 있다. 방송을 놓치면 내 사연이 어떻게 읽혔을까. 사연 후 청취자의 문학적이고 감성적인 반응이 소개되곤 하는데 그 부분이 뭐였을까 아쉽다.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을 때 이 코너에 글을 쓰게 된다. 안 되기도 하지만 소개되면 따뜻하기 때문이다. 온기가 필요하고 누군가의 눈인사가 필요할 때 위로가 되어서 라디오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