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ter가 세상을 사랑하는 법 Vol.2
가을은 늘 이방인이었다.
카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계절에도 그런 날이 있다.
분명 가을이 왔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날.
가을은 그렇게 늘 빨리 오듯 늦게 오며, 소리 없이 찾아왔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시원하기도 왠지 쓸쓸하기도 했다. 옆자리가 공석이거나 내일이 막막하거나 관계가 어려울 때면 더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감추기 위해 무언가 하나를 더 걸쳐야만 했다. 감싸는 게 나의 체온인지 내려간 자존감인지 군중 속에 느끼는 외로움인지는 늘 헷갈렸다. 어쩌면 모두일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늘 이방인이었다. 여름이 끝난 후 찾아오는 이방인. 겨울로 가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이방인.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방인 같았다. 그 고독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시간의 순환 속에서 손을 놓았다. 그렇게 큰 재앙도 슬픔도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인생의 여름과 겨울은 또렷이 기억되지만, 가을은 유난히 희미하다. 가을이 특별하지 않은 데에는 절대적인 길이가 짧은 것도 있지만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기억에 남는 것은 겨울이 지나고 찬란했던 봄, 지독하게 뜨거웠던 여름, 결국 찾아왔던 마음의 혹한기다. 그 사이에 분명히 가을은 존재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지금이 나의 가을일지도 모르겠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겨울을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하다. 혼자라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던 시절을 지나, 고독을 인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여름처럼 뜨겁지 않고, 겨울처럼 차가우며 함박눈이 내리지도 않는다. 떨어지는 낙엽에 연연하지 않으며, 그저 골목길에 쌓이는 낙엽이 치워야 할 쓰레기로 보인다.
그렇다고 고독만이 나를 완전히 지배한 것은 아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시를 한편 쓸 정도의 낭만을 알고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뜨거운 차 한잔이 주는 여유도 알고 있다. 가을이 주는 낭만과 여유는 고독의 멋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면 결국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있다. 그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결국엔 봄이 올 것을 알고 있다. 봄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기어코 여름이 온다. 우리는 그 계절을 살아가고 있다. 변화한다는 것은 시련이 올 수도 있지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꿈을 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지금의 계절이 조금은 건조한 가을이라도, 코트 하나로는 너무 춥더라도 잠시 이 계절에서만 할 수 있는 낭만에 젖어본다. 고독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본다. 예쁜 단풍을 보며 시를 써내려 간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고독과 외로움은 삶을 무뎌지게 만든다. 이방인이 그러했듯 어머니의 죽음마저 담담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런 삶 속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나아갈 자신은 없다. 그저 숨이 차오르면 내쉬고, 단풍이 피면 구경하다가 사진도 찍을 셈이다. 외로우면 친구를 그리워하고, 가끔은 집밥이 그리워 엄마에게 전화도 하겠다.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면 시를 쓸 테다. 그러다 조금 덥다면 외투를 잠깐 벗어놓을 것이고, 더 추워진다면 코트를 꺼낼 것이다.
지금 내 삶이 건조하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의 눈을 기다리고, 봄의 숨결을 꿈꿀 수 있는 계절이니까.
내 안에 지는 모든 것은
언젠간 다시 피어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