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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May 11. 2021

최고의 퇴근길


집에 도착하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얼른 샤워를 하고 며칠 전 길에서 산 토마토 세 개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고 엄마가 갖다 주신 매실액을 살짝 뿌리니 훨씬 맛있었다. 한 시간 넘게 걸었더니 배가 고팠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토마토만 먹기로 했다.

 







이직을 하게 되면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오피스텔이 많은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다 맘에 들지 않았다. 복잡하고 좁은 도로에 있는 오피스텔 룸, 방이 너무 작고 지저분한 곳들을 몇 군데 둘러보니 들어가서 살고 싶은 맘이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굳이 이 근처가 아니어도 되니 좀 더 넓고 깨끗한 곳은 없나요? 보증금과 월세는 더 드릴수 있어요"

 

방을 둘러본 후 내 마음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중개인에게 사정하듯 물어봤다.




"혹시 지하철로 두 정거장 정도 거리도 괜찮은가요? 그곳에 괜찮은 곳이 있거든요"


젊은 청년 중개인의 확신에 찬 말투에 무조건 가서 보겠다고 했다.







이곳을 보자마자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조용하고 한적한 주거단지여서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방금 본 원룸들에 비해 방이 훨씬 넓었고 (그래도 원룸이지만) 수납공간이 방 한쪽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옷장과 서랍을 따로 살 필요가 없었고 세탁기, 건조기, 전자레인지, 티브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새 건물이라 방이 깨끗했다. 벽장이 다 하얀색이어서 이 방을 보자마자 어두웠던 마음이 금세 밝아졌다. 


쾌적한 환경의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얼마 전 지도를 보다가 회사에서 집까지 1시간 반 정도 걸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에서 회사까지 강변을 쭉 따라 걸으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며칠 전, 퇴근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따라 걸어보았다. 정말 강변을 따라 한 시간 좀 넘게 걸으니 집 근처 지하철역까지 바로 닿을 수 있었다.


첫날은 오랜만에 걷느라 허벅지가 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운동을 안 했더니 체력이 약해진 것이다. 강변에는 저녁에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며칠 후 다시 운동화를 신고 이 길을 따라 걸으며 퇴근을 했다.








걷기 시작하자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부족한 모습들, 들여보기 싫은 어떤 감정들도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풀냄새를 맡아보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맑고 차가운 공기가 온 얼굴을 뒤덮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어떤 짜릿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걷는 걸 좋아하는데 자연을 벗 삼아 걸어서 퇴근을 할 수 있다니, 나에게는 최고의 퇴근길이었다. 


걷다 보니 땀이 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니 몸과 마음이 개운했다. 회사에서 있던 일들도 잊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이 있다는 것, 걸어서 퇴근 후 혼자 온전히 쉴 수 있는 나만의 "쾌적한" 공간이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걸으면서 퇴근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독립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하게 될 줄도. 


새로 생긴 나의 공간에서 앞으로 얼마나 지낼지 나도 모른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열심히 걸으며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는 좋은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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