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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Sep 10. 2021

가을재킷 한벌에 설레게 된 이유

"혹시 체크무늬 재킷은 없나요?"


이 옷 저 옷을 구경하다 며칠 전 핸드폰에서 본 체크 재킷이 생각났다.  점원이 바로 옆에 걸려있던 재킷 몇 벌을 갖다 주었다.


입어만 보자 하는 마음으로 옷을 걸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  


거울 속의 내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코엑스에 행사가 있어서 오랜만에 회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출근을 했다. 끝나고 나오니 퇴근시간이었다.


지하철역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인파를 보니 숨이 콱 막혔다. 저 틈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집에 바로 갈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회사 밖 다른 풍경 속에서 좀 더 있다가 돌아가고 싶었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바로 옆에 벤치가 있어서 가서 앉았다. 앉자마자 내 앞으로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오랜만에 삼성역에 오니 건물은 예전보다 더 화려하고 사람들도 새롭게 보였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고 이 낯선 느낌을 만끽하고 싶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니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선릉역이 나오고 역삼역으로 이어져있었다.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채 퇴근하는 인파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데 내 앞으로 유독 이쁘게 정장 차림을 한 여자분들이 눈에 띄었다. 어쩜 저렇게 날씬할 수 있을까? 여자인 내가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세련되고 이뻐 보였다.


문득 신입사원 시절에 매일 정장을 입고 출근하던 기억이 났다. 출근을 할 때 운동화를 신고 뾰족구두를 쇼핑백에 항상 담아서 가져갔다.


회사 도착 직전, 옆 건물에 들어가서 운동화를 벗고 쇼핑백에 담아온 구두를 꺼내 갈아신었다. 다른 직원들보다 항상 일찍 출근했는데 그때는 누가 운동화를 신은 내 모습을 보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다.


지금은 뾰족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발이 편한 게 최고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여러 켤레의 운동화만 돌려 신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선릉역까지 오게 되었다.


저 멀리 익숙한 브랜드의 옷가게가 눈에 띄었다. 이 브랜드의 옷을 가끔 사곤 했는데 원단이 좋고 핏이 나랑 잘 맞아서 예전에 산 옷을 아직도 잘 입고 있었다.


입구 앞을 서성이다 구경만 하려고 들어가 보았다.


이 옷 저 옷을 살펴만 보고 있자 점원이 다가오더니 방긋 웃으며 입어봐도 된다고 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말투와 과하지 않은 친절함에 살짝 마음이 놓였다.


옷을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독립을 한 이후,  월세에 생활비를 내고 나니 계획했던 것보다 돈이 잘 안 모여졌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고 옷은 더 이상 사지 않기로 했다. 안 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매장에서 점원이 추천하는 재킷을 입어봤는데 다행히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매장을 그냥 나가기가 아쉬웠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구경만 하던 체크 재킷이 생각났다. 무심결에 체크 재킷은 없냐고 물어봤는데

마침 내가 찾고 있던 비슷한 디자인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그냥 입어만 보려고 했다. 그런데 체크 재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에 그만 홀리고 말았다.


세련된 스타일의 한 여성이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나타나면 바로 사야 한다는 신념이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타나버렸다. 결국 체크 재킷을 사고야 말았다.  


평소 쇼핑할 때 쓰는 금액 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재킷을 계산하고 매장을 나오는데 여러 생각이 오갔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좋은 설렘이 온몸에 느껴졌다.


이 체크 재킷을 걸치고 어느 멋진 장소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되었다.  


그래 이 정도 가격은 괜찮아. 나도 충분히 비싼 재킷을 입을 자격이 있어.


애써 나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선선한 가을이 빨리 오길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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