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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Sep 21. 2021

스펙보다 중요한 것

"oo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제 스펙으로 가능할까요?"


"토익점수가 700대인데 이 스펙으로도 oo 회사에 지원해도 될까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 취업준비를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인터넷의 어느 취업카페의 게시물서 "스펙"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스펙? 스펙이 무슨 뜻이지?


영어단어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떠오른 단어는 Specification (사양, 설명서)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말의 줄임말인가?


5년을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Spec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한국에서만 쓰이는 이 스펙이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된 후 깜짝 놀랐다. 개인을 점수로만 평가하는 이 사회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강남역에 왜 그렇게 토익학원이 많은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다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은연중에 해외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 "와 스펙이 화려하시네요~"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아니 시험을 친 사람이 본인 맞나요?"


면접관이 의아해하며 점수지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다른 면접관들도 놀라 하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 드디어 내 시험지를 채점하셨구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디로 숨고 싶었다. 면접관들은 더 이상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스페인어 특기자"를 뽑는다는 어느 대기업의 입사 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었다.


서류합격이 이후 토론 전형을 거쳐 마지막으로 필기시험을 봐야 했는데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시험영역은 국어와 수학이었다. 국어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들로 가득했고 수학은 질문조차 이해가 안 됐다. 옆에서 열심히 문제를 푸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찍기"밖에 없었다. 결국 그 회사에 불합격을 하고 말았다.


스페인어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국어, 수학도 잘해야 한다니. 수학이 싫어서 한국을 떠났는데 다시 수학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외국에서 다니며 국어공부를 안 하지 10년이었다.


이후 회사 입사전형에 필기시험이 있으면 무조건 나는 갈 수 없는 곳, 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취업활동을 하면서 국어와 수학 때문에 나 자신이 참 창피했다. 물론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어도 그 힘을 거뜬히 통과했을, 나보다 "똑똑한" 인재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스펙이 화려하시네요"라는 말은 오히려 이런 똑똑한 인재들에게 더 맞는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스펙이 화려하다고" 했던 말은 외국생활을 오래 하고 해외에서 학교를 다닌 겉모습만 보고 내가 남들과는 다르고 특별할 거라는 판단에서 나온 어떤 기대심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내가 입사시험에서 국어와 수학시험을 망쳤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국어와 수학 때문에 그 스펙이 화려하다는 말에 점점 부담이 커갔고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실력이 없는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라며 나 자신을 코너로 몰았다.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언젠가 들킬 수도 있게 되겠구나, 라며 나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자신감도 없어지고 사람들 앞에 나를 드러내기가 두려워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국어와 수학 대신 외국어를 더 좋아했다.


외국어 때문에 해외에 갔고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들보다 국어를 못하고 수학 실력이 안 좋은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스페인어 특기자를 뽑으려고 했던 그 회사는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을 원했던 거였을 수도 있다.


나하고 전혀 맞지 않는 시스템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하다 보니 이리 튕기고 저리 튕겨나가며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최근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을 통해 재능을 펼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열정에 감탄을 하게 된다. 좋아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고,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을 키워 퇴사 후 1인 사업가가 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쩜 다들 이렇게 부지런할 수 있을까? 싶다.



"스펙이 화려하다"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을 의미해야 하지 않을까?  


살이 쪄서 고민이라면 일주일 동안 밀가루를 끊거나 하루 한 시간씩 꾸준히 걷는 것을 실천하는 것처럼.


되고 싶은 내 모습을 상상하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할 일을 해나간다면  이 또한 나만의 유일무이한 스펙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학력, 토익점수 혹은 국어와 수학 점수가 다가 아닌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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