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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Sep 22. 2021

불안함을 잠재우고 싶다면

"똑 똑 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젊은 백인 여성분이 나를 맞았다. 


"하이" 하고 인사를 하자 이 분도 날 보며 웃어줬다. 


당시 어떤 용기로, 어떤 마음으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절박함"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다. 학교 복도에 있는 게시판에 "무료 카운슬링"을 한다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다음 날, 바로 사무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핑크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내부 벽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경계심이 확 놓였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덩치가 큰 여자분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친절했던 그녀 덕분인지, 아니면 사무실 인테리어 때문인지 그곳의 첫 느낌은 상당히 따뜻했다.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안경을 낀 한 남학생이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었다. 내가 바로 앞에 앉아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잡지에만 몰두해 있었다.  






당시에는 수업을 들으러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였다. 주말에는 밀린 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교 캠퍼스는 시골 동네여서 주변에 갈만한 곳도 없었다. 유일한 외출은 일주일 치 먹을 것을 사러 월마트를 가는 게 전부였다. 



숙제를 하려고 도서관에 가면 제일 먼저 가방에서 꺼낸 건 타이레놀이었다. 타이레놀 200알이 넘게 들어가 있는 플라스틱 통을 매일 가방에 넣고 다녔다.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관자놀이 주변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또 눌렀다. 두통 때문에 집중이 잘 안돼서 중간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숙제를 다하고 집으로 가면 밥을 먹고 또 타이레놀을 먹었다. 타이레놀이 없는 일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두통과 더불어 날 괴롭혔던 건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었다. 학교 졸업 후, 앞으로 어디에 가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미국에 남아야 할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지, 어디서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한국 유학생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외국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친구를 잘 사귀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힘든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카운슬링을 찾았다. 


에콰도르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카운슬링을 계속 받아서였는지 상담을 받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두발로 상담실을 찾아갔다. 


상담을 받으면서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관심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속에 품고만 있던 생각,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불안감을 조금씩 떨쳐낼 수 있었다. 이후 2주일에 한 번씩 카운슬링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할 때,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누군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카운슬링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힘들 때마다 일기를 열심히 썼다. 내 마음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힘든 일이 있다면 그 힘듦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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