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Sep 25. 2021

내가 사는 공간에 꼭 필요한 것

에콰도르 시골마을에서 받은 선물



동생: 월세를 내고 사느니 대출을 받고 살 집을 알아보는 게 어때?  


나: (속으로) 집? 내가 집을 산다고? 


동생: 알아보면 괜찮은 곳이 있을 수도 있어. 


부동산 지식인 전무한 내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졌다. 







독립을 하면서 월세를 내고 살기 시작했다. 


월세, 생활비, 관리비, 전기세 등 한 달에 한번 정산을 하고 참 허무했다. 더 이상 뭘 더 아끼고 살아야 하지? 한숨이 나왔다.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동생의 말에 속이 뜨끔했다.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지도 모르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만약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안되면 어떡하지? 갑자기 마음이 타들어갔다. 


고공행진을 하는 집값을 볼 때마다 한국에서 내 집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들 어떻게 돈을 벌고  재테크를 하는 건지, 아파트가 이렇게 많은데 과연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내 "집"만 있으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끈후끈한 열기에 갑자기 눈이 떠졌다. 왜 이렇게 더운 거지? 


창문 밖 파란 하늘 아래 초록색 물결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가 그 옆을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없었다. 처음 보는 나무였다. 나무 잎사귀는 굉장히 컸다.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보니 세상에, 초록색 바나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알고 보니 바나나 나무들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바나나는 꽤 비싼 가격이어서 자주 먹을 수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일은 바나나였다. 







에콰도르 키토의 수도는 1년 내내 서늘한 가을 날씨였다. 


버스 안이 후덥지근해지자 키토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토에서 과야킬까지는 버스로 7~8시간이 걸렸다. 버스가 다니는 길 옆에 열대과일을 파는 장사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록색 바나나 여러 송이가 주렁주렁 나무에 그대로 매달린 채 거리에 있었다. 







에콰도르에서 학교를 다닐 때, 방학을 맞아 과야킬 근처 시골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언니를 만나러 갔다. 


선교사 언니가 이렇게 먼 곳에 사는 줄 몰랐다. 버스가 중간에 정차할 때마다 꼬마 아이들은 옥수수, 봉지 콜라 등 먹을거리를 팔러 버스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선교사 언니가 아는 에콰도르 현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엉덩이가 계속 들썩 거렸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현지인 집은 시골의 깊숙한 어느 마을에 있었다. 



도착하니 허름한 오두막 같이 생긴 집 앞마당에서 가족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집안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넓은 방 하나에 침대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가족이 함께 생활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한쪽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고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쉬고 계셨다. 낡은 가구 옆에 액자가 벽에 걸려있었다. 


방에 있는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창가 근처에 가니 저 멀리 바나나 나무가 보였다. 







밑으로 내려와 밖에서 다 같이 식사를 했다. 닭고기 수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한입 먹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본 바나나 나무가 또 보였다. 



바나나 나무를 가리키며 내가 바나나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자 누군가 뛰어가더니 나무에서 바나나를 한송이를 따다 주었다. 갑작스러운 바나나 선물에 깜짝 놀랐다. 그라시아스 (Gracias, 스페인어로 감사하다는 뜻)를 외치자 그들도 좋아해 했다. 그들의 후한 인심에 마음 한편이 따뜻했다.  






내 눈에는 그들이 사는 모습이 참 풍족해 보였다.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요리, 뜨겁게 끓고 있는 솥 옆을 기웃거리던 개들과 나에게 바나나를 선물했던 그 여유까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오두막이 최고의 별장처럼 느껴졌다. 


이 따뜻했던 순간이 내 뇌리에 박혔던 걸까? 이후 에콰도르를 떠나 미국에 살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무리 누가 으리으리한 곳에 산다고 해도, 부럽다는 생각이 그리 들지 않았다. 


한 연예인이 대저택같이 넓은 공간에서 혼자 지내가 결국 우울증에 생을 마감을 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아무리 비싸고 넓은 집에 살아도 그것이  결코 행복을 주는 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부모님과 함께 살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집 마련"에 대한 걱정에 부동산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에콰도르 시골마을에서 바나나를 선물 받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잊고만 있던 그곳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싶은 곳은 어떤 곳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막연히 집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내가 어떤 공간에서 지내고 싶은지에 대해서. 


결국 "집"이라는 공간은 누구와 어떤 추억을 만들어가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그게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또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공간,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내 공간과 그 주변에는 온기가 가득하고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에콰도르 시골마을의 바나나 나무에는 바나나가 많이 열렸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불안함을 잠재우고 싶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