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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Jan 12. 2022

무미건조한 내 일상에 자극을 준 것  


갑자기 사무실이 환해졌다. 무슨 일이지? 알고 보니 앞쪽 창문의 블라인드가 올려져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직원이 걷어 올렸다고 했다. 블라인드는 종이짝처럼 얇았고 항상 내려져 있었다. 창문 밖이 보이지 않았지만 얇은 종이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서 그동안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지도 몰랐다.


미세한 차이지만 블라인드를 걷자 사무실 안이 한층 환해졌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 창문 밖으로 비행기 한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엇, 비행기네?  놀랍고 신기했다.






비행기는 창문 밖에서 계속 나타났다. 일을 하다가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면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건물이 14층이라서 그런 걸까? 육안으로 보이는 비행기의 외관 색깔로 어떤 항공사인지 구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모습이 선명했다.


비행기는 곧 착륙을 하려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는 듯했다.


저 비행기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니 비행기를 탄지가 정말 오래되었다.


한때 회사에서 출장을 갈 때 비행기를 수시로 타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스페인으로, 그리고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가는 벅찬 일정이 전혀 힘들지 않았었다. 비행기 타는걸 워낙 좋아해서 장시간 비행을 오히려 즐겼을 정도였다.






좁은 좌석에서 삼시 세 끼를 먹으며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여러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주하며 오롯이 나와의 시간을 즐겼었다.


가끔 의자 뒤에 붙어있는 스크린 속 지도를 보며 내가 이 지구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밌었다. 가끔은 시베리아 벌판 위에 있었고 또 어떤 때는 태평양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창문을 열면 몽글대는 구름 위에 둥둥 떠있기도 했고 그 구름을 멍하니 한참 동안 바라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서서히 맑아졌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비행기라는 공간은 "현재"라는 물리적 시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신비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것과 철저히 분리될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면 괴로운 공간일 수도 있지만 잠시 떠났다 돌아오는 상황이라면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비행기를 타고 갔던 많은 곳들이 떠올랐다.


최근에는 뉴욕이 많이 생각났다. 예전에 살던 동네는 아직 그대로일까?


자취생활을 하던 곳의 대만인 집주인 가족은 왠지 아직도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똑똑, 문을 두들기면 분명 날 알아볼 텐데.


덜컹거리는 뉴욕 지하철을 타고 예전에 갔던 많은 곳들을 찾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갈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그럴 수가 없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희미하게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곳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미국에 있을 때는 한국이 미치도록 그리웠는데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반대로 그곳을 이토록 찾게 될 줄이야.


지금은 유튜브 영상 클릭 한 번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뉴욕과 관련된 영상은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언젠가 검색창에 "뉴욕"이라고 적었다가 화면이 나오는 순간 바로 꺼버리고 말았다.  현지에 가서 두 눈으로 모든 풍경을 실제로 볼 수 있을 때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아껴놓고만 싶었다.






오늘도 창문 밖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최근의 일상에 하늘 위 비행기가 잠들어 있던 감성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또 어떤 장소로 날 데려갈까.


어쩌면 마주하기 싫고 또 한동안 잊고만 있던 그곳으로 데려갈 것이 분명하지만 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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