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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Oct 29. 2020

나는 파리에서 셀룰라이트를 제거했다






숙소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해가 뜨기 전에 빨리 가야 할 텐데. 정류장에 도착하자 마침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28번 버스였다. 이날 나는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새벽에 센강 산책하기"를 실행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다행히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고 센강 근처에서 내렸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날이 조금씩 밝아왔고 에펠탑 근처에 다다르자 아침이 되었다. 버킷리스트를 이루게 되어서 마음이 뿌듯했다. 









C 회사를 다닐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PT를 받기로 결심했다. 평소였으면 거금을 들여 왜 운동해? 했겠지만 퇴근을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어떤 허탈감이 내 마음을 덮쳤다. 실적에 대한 압박과 그로 인한 불편한 인간관계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한계가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꾹 참고 있다가 퇴근을 하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일이 끝나면 쇼핑으로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집에 가면 내일 출근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감정의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회사 근처 옷 매장에서 혼자 헤매고 있는데 헬스장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침 긴 생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진한 핑크색 레깅스를 입은 어떤 여자분이 운동을 마친듯한 모습으로 헬스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여자인 내가 봐도 몸매가 너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문득, 나도 퇴근을 하고 운동을 하러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검색을 해보니 회사 근처에 헬스장이 꽤 많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헬스장을 찾았다. 회사가 끝나면 무조건 헬스장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퇴근 후 복잡한 감정이 나를 덮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혹시라도 등록을 하고 안 갈 경우를 대비해 거금을 들여 트레이너와 함께 PT를 받기로 했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퇴근을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일주일에 3번, 퇴근을 하면 지하에 있는 헬스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물론 가기 싫은 날도 많았다. 그런 마음을 꾹 참고 헬스장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삭막한 사무실 공기와는 정반대의  활기찬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는 검은색 레깅스를 입었고 운동하는 여자 대열에 합류한듯한 내가 맘에 들었다. 처음 해보는 근력운동은 힘들었지만 온몸이 땀범벅이 된 후 샤워를 하고 나오면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조금씩 변화해가는 내 몸을 발견해가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을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었다. 허벅지 뒤쪽의 셀룰라이트였다. 아무리 런지를 하고 스쿼트를 해도 거울 속 허벅지 뒤쪽의 셀룰라이트는 그대로였다.







C 회사를 나오게 되면서 PT도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다. 그동안 출장을 다니면서 모은 마일리지로 유럽행 티켓을 끊었다. 혼자 2주 동안 파리에 머물다오 기로 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첫 1주일은 지도를 보며 걷고 또 걸었다. 파리는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혹시라도 파리의 숨겨진 풍경을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파리의 골목 구석구석을 느끼고 싶었고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걷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회사에서 느꼈던 압박과 인간관계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을 떨치고 싶어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 거지?"



파리 시내를  걸으면서 여러 생각과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떤 이의 날카로운 표정이 불쑥 나타나 잠잠했던 마음을 흔들어댔다. 날이 섰던 그날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숫자로 평가를 받는 일을 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해도 숫자로 증명해내지 못했을 때, 모든 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지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며 출퇴근을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잘 알지도 못하는 파리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있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감탄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리가 아파서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숙소에 들어와 낮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다시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몸이 너무 안 좋은 날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진통제를 먹고 푹 잤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일어나 다시 밖으로 향했다. 가까운 마트라도 둘러보고 들어와야 속이 후련했다. 숙소로 돌아오면 다리는 얼얼했고 지쳐서 금방 들었다.







"어머, 너 다리에 셀룰라이트가 다 없어졌어!"



파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날, 옷을 갈아입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 방으로 오시더니 깜짝 놀라 하셨다. 내 뒷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니 매끈해진 허벅지가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을 켜고 자세히 봐도 울퉁불퉁한 흔적이 안보였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해도 안 없어지던 셀룰라이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친 몸을 이끌고 걷고 또 걸은 결과가 셀룰라이트 제거로 이어질 줄이야.






파리에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을 때 나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울컥한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걸으면서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었고 2주가 끝 나갈 즈음에는 마음이 한층 가벼웠다. 우연히 마주쳤던 파리의 모습은 이 세상에는 또 다른 풍경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멀리 떠나지 못하는 요즘, 복잡한 마음으로 혼자 파리 시내를 걸었던 그때의 시간이 오래전에 꾼 아름다운 꿈처럼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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