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차이 히또쯔 오네가이시마쓰"
메뉴를 쭉 읽다가 카페인이 없는 음료가 뭐가 있을까, 하고 보니 생강차이 라테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일본을 여러 번 올 줄 알았으면 일본어 공부를 좀 더 할걸, 살짝 후회가 들었지만 어느 순간 일본어 공부 놓아버렸다. 일본어를 꼭 배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여행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래, 이렇게 음료라도 시킬 수 있는 게 뭐야.
도쿄에 올 때마다 루틴처럼 매일 가는 카페가 있다. 이번에도 여행의 첫날을 이 카페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밤늦게 퇴근한 동생은 아직 꿈나라였다. 눈뜨자마자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가방을 챙긴 뒤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영풍문고에서 천 원주고 산 나의 최애 노트와 젯스트림 볼펜을 가방에 챙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점원이 건네준 생강라테와 레몬물이 올려준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고 그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생강라테를 한 모금 마시니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아, 그제야서야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혼자 온 사람들이 노트북을 보며 업무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프리랜서일까, 아니면 재택근무하는 중일까? 나도 사무실 말고 혼자 카페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명은 둘러앉아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 소리는 소곤소곤 대는 수준이어서 전혀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소음이 있어서 더 좋았다.
그리고 매장 안에는 귀에 익은 재즈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트를 넘기고 볼펜으로 오늘의 날짜를 적었다. 아, 이게 얼마 만에 쓰는 손글씨인지. "도쿄에서의 두 번째 날이다!" 라며 일단 썼다. 일기를 쓴 게 얼마만인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면 오전 일기를 써보라고, 모닝 페이지를 쓰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나였는데 데 어느 순간부터 그 쓰는 일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공간을 유튜브와 인스타로 채우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유튜브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심지어 잘 때도 틀어놓고 들으며 잠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집을 나서기 전까지 유튜브를 틀어놓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할 때도 유튜브를 봤다. 이런 행위를 몇 개월 하다 보니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편하고 좋았지만 재밌는 콘텐츠들이 점점 식상하게 느껴졌다. 이 채널 저 채널 옮겨보다, 쇼츠를 보다 보면 시간은 훌쩍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한 거지.
허무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책을 조금이라도 읽으려고 노력했고, 일기도 자주 썼는데 이 모든 행위들을 어느 순간 툭, 놓아버리고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편안함 속으로 숨어버렸다.
나 자신을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외면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다 보니 점점 내 안에서 무언가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창가자리의 도쿄의 카페에서 드디어 노트를 펼쳤다. 아, 이게 얼마 만이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둘씩 밖으로 끄집어냈다. 나 자신과 오랜만에 마주한다는 이 순간이 왠지 설레었다. 오랜만에 쓰는 글씨는 참 삐뚤고 어디론가 휙휙 날아갔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응어리들이 서서히 밖으로 나왔고 세 번째 마지막 페이지를 써 내려갈 때는 마음이 한껏 가벼웠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안 써지던 글이 도쿄에서는 이렇게 술술 써지다니.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고 혼자 고민하고 고심했던 순간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을 적어 내려다가 보니 어쩌면 내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상황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내가 관점을 다른 데로 돌리면 돼,라는 결론과 함께.
그냥 써 내려가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머리를 붙들고 있던 고민들이 해결이 되었다.
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몇 모금 남은 생강라테를 마저 마셨다. 끝맛이 너무 달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감미로운 재즈 음악은 매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카페공간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멍 때리며 앉아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3일을 또 열심히 걸으며 돌아봐야지, 하며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카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