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내려고 눈치 안 봐도 되는 날
"진찰실에 들어가서도 의사 선생님이 지시할 때까지 마스크를 벗지 마세요"
접수를 끝내고 대기를 하는데 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진찰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티브이에서 코로나 검사를 할 때 자주 보던 파란색 가운을 입고 계셨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의자에 앉자 선생님이 내 증상을 물으셨다. 열이 있는지, 몸살 기운이 있는지, 감기가 있는지. 왠지 코로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스크를 쓴 채로 목이 부어서 침을 삼킬 때만 아프다고 했다. 며칠 전 갑자기 추운 날씨에 얇은 코트만 입고 걸었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편도선이 부은 게 분명했다.
의사 선생님이 마스크를 벗으라고 하셨다. 마스크를 벗자 선생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입을 벌리라고 하셨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목구멍이 잘 보이도록 있는 힘껏 입을 벌렸다. 이비인후과에 가면 목에 약도 뿌려주고 콧속에 긴 면봉을 넣어서 소독을 해주곤 했다. 나는 콧속 깊숙이 무언가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싫어서 진찰을 받을 때마다 그걸 거부했었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콧속을 보자고 하시면 나는 그건 해주지 마세요!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티브이에서 자주 보던 플라스틱 투명 마스크를 쓰고 있던 마스크 위에 덧대어 쓰셨다. 아, 하고 입을 벌리자 아주 잠깐 내 목을 훑어보시더니 본인 책상 앞으로 바로 의자를 돌리셨다.
"목이 많이 부으셨네요. 오늘은 주사를 맞고 이틀 치의 약을 줄 테니 몸이 안 좋으면 다시 오세요"라고 하셨다.
걱정했던 코 검사를 안 해서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진료가 빨리 끝나다니. 네, 하고 의자에 일어나자 선생님은 쓰고 있던 장갑을 알코올로 열심히 닦기 시작하셨다.
기관지를 체크하는 이비인후과이다 보니 아무래도 환자를 진료하기가 조심스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빨리 끝난 진료에 내 증상이 홀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틀분의 약을 다 먹었지만 목이 안 나아서 다시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완전무장을 하고 계시는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는 내 목은 보지도 않고 증상만 물어보셨다. 그리고 오늘까지 주사를 한번 더 맞으라고 하셨다. 목 상태를 확인도 안 하는 선생님이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병원에서 입을 크게 벌리면 나한테도 감염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고 찬물을 계속 마셔댔다. 밥을 먹고 약을 먹으면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목이 아픈 게 느껴졌다. 다시 병원에 가기 싫어서 소금물로 목을 열심히 헹구고 프로폴리스를 몇 방울씩 목에 떨어뜨리며 빨리 몸이 낫기를 바랐다.
감기에 걸리니 나의 일상이 그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몰입하던 순간들,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즐기며 산책하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밖에 못 나가니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낭비하는 것 같아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회사에 다녔더라면 약을 먹고 어떻게 해서라도 출근을 했을 텐데. 어떻게 해서라도 일을 했을 텐데. 내가 게을러지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아픈 티를 내면 왠지 루저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아 몰래 약을 챙겨 먹으며 버티었던 시간들도 생각났다. 약기운 때문에 너무 졸려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책상 앞에서 몰래 눈을 감고 있던 날도 있었다. 하루 연차를 내도 될 걸, 그때는 아파도 출근을 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부은 목은 많이 나았고 컨디션도 많이 회복한 지금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아파도 집에서 마음껏 쉴 수 있으니 정말 좋았다. 그리고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