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던 기록해 두는 습관을 기르자!
“안녕하세요. 저는 OOO 방송국의 OOO 기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부터 채용에서 부모님 직업, 혈액형, 외모 지적 등 부당한 질문이나 발언이 나오면 법적 처벌 대상이 되는데요. 이와 관련한 기사를 준비하던 중 사례를 찾다가 블로그를 보게 되어 댓글을 남깁니다. 혹시 당시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전화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보고 순간 내가 뭘 잘못 읽었나 싶었다. 누가 장난으로 댓글을 달았나? 그런데 기자 이름이 왠지 친숙했다. 당시 즐겨보던 저녁 뉴스의 한 프로그램에서 본 듯 한 이름이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그랬는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하지만 그 저명한 방송국 기자가 설마 내 블로그에 정말로 댓글을 달 줄이야.
그 해 겨울, 나는 재취업을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채용사이트의 지원서의 버튼을 누르고 또 눌러댔지만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당연히 면접까지는 가겠지라고 생각했던 기업에서 서류조차 통과되지 않자 이러다 영원히 취업을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던 중 한 회사로부터 오랜만에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하철을 2 시간 타고 힘들게 면접장소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어서 빌딩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매우 차가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르는데 직원이 오더니 종이와 펜을 건넸다. 면접실에 들어가기 전에 작성을 해 달라고 했다.
뭘 적으라는 거지?
종이에는 나의 기본 인적사항 외에 혈액형, 종교, 음주 여부, 그리고 부모님의 직업을 적는 칸이 있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고 적기가 너무 싫었다.
내 이력서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연락을 했던 게 아니었나? 그들이 요구하는 개인적인 질문들에 답하기가 정말 싫었다.
나는 칸을 다 채우지 않고 종이를 직원에게 건넸다.
면접실에 들어가자 면접관이 왜 칸을 다 채우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나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러자 그분이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더니 왜 이걸 적으라고 했는지 궁금하냐고 했다. 그러더니 부모님 직업이 뭔지 알아야 그 직원의 가정환경을 파악해서 행동 됨됨이를 알 수 있고 혈액형을 알아야 직무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면접 경험 몇 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분의 혼잣말 설교는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나의 능력과 가능성을 보고 믿고 뽑아야 할 자리에서 왜 이런 것들을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원하는 부모님 직업, 혈액형, 종교, 주량을 적어서 공고를 내시지요?라고 쏴 붙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예의 상 그분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다. 면접보다는 취조당하는 느낌이 훨씬 강했 다. 사무실 공기가 너무 텁텁하게만 느껴졌다.
그분의 설교가 끝나고 건물 밖을 나와 시계를 보니 무려 1시 간 반이나 지나있었다. 한겨울의 찬 공기가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에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왜 그 안에서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있었어야 했을까? 면접 중간에 벌떡 일어나서 그냥 나올걸. 아무리 생각해도 지원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도착했는데 기분이 너무 찝찝했다.
어디에라도 이 감정을 쏟아붓고 싶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을 꺼내어 블로그에 접속했다. 한숨을 푹 내쉰 후 키보드 자판을 열심히 두들겼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그 글을 올린 지 4개월 뒤 면접 때 부모님의 직업이나 혈액형, 외모 지적 등 부당한 발언이 나오면 법적 처벌 대상으로 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오자마자 분을 풀기 위해 키보드 자판을 열심히 두들기며 카페에서 썼던 글이 방송국 기자에게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읽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장난전화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는데 정말 방송국의 기자였다. 그날 저녁, 기자와 통화한 내용이 뉴스에 방송이 되었다. 비록 목소리만 나왔지만 내가 뉴스에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날 일을 기록 해두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방문자가 많이 없는 내 블로그에 면접 때 비슷한 경험으로 속상했다는 사람들의 댓글이 달릴 때마다 너무 신기했다. 나는 같이 욕도 해주고 함께 응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