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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Apr 24. 2023

딱 한 걸음만 더,

남 일을 내 일처럼 돌보는 태도는  직장에서 배웠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직장이었어. 굉장히 폭력적이고 비정한 조직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던 곳.


공학이나 경영학에서 상정하는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20대 초반에 가졌던 인간관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규범의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 이익 위주로 움직이는 게 사람.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남 일을 내 일로 여겼다. 정확히는 내 것, 네 것 구분이 없는 것 같았다. 공동선을 위한 목표와 과제가 제시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네가 네 일을 잘 하도록 돕는 것 또한 내 일 중 하나다, 라는 태도들.


갓 입사했을 때는 사람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호의와 선의로 구성된 세계라니.

그러나 차츰 이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나 역시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런 태도와 행동이 몸에 베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간관도 수정되었다.


협상 업무를 오래하는 동안, 철저히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행동과 동기를 해석하고 예측하는 사고가 숙달되었는데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밑도 끝도 없는 인간의 선의와 호의에 대한 낙관이 존재한다.


첫 직장이 큰 선물을 남겼. 그런 깨달음에 이르자 갑자기 이 직장에 20대를 다 갈아넣은 게 아깝지 않게 여겨진다.




문제는, 그 신실한 태도가, 일단 일이 품에 떠안겨진 이후에만 발휘된다는 점.


요구에 응하는 게 익숙하고, 그게 별로 어렵지도 않은 사람이 되었다.

기질이 원래 그러해서 그런 직장생활이 잘 맞았는지, 그런 직장생활 덕에 그런 기질이 되었는지, 그 선후는 이제 잘 모르겠지만, 한밤중이라도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삶이 힘들지 않았다. 얼마나 늦은밤이든, 그 때에 나의 처지가 어떠했든, 요구가 얼마나 과도한 것이었든, 대체로 기쁘게 응했던 것 같다.


어려운 건, 호출과 요구가 없을 때에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었다.

상황들을 잘 관찰하고 있다가, 요구를 받기 전에 먼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왜 이렇게 약할까.

먼저 다가가 품에 안아오는 일을 왜 이렇게 못할까.




변호사로 일을 하면서 마음이 상하는 상황들은 다양하지만

어떤 것이든 그 뿌리는 신임관계 훼손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의뢰인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든, 의뢰인이 나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든.

대개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문제다.


그러나 몇주 전엔 후자로 인하여 해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내 잘못은 아니었다.

그 의뢰인의 특수한 사정이 작용하기도 했고, 일을 하다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는 일이야 심심치 않게 있으니까,

나는 누구로부터도 비난이나 책망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아쉬운 영역이 분명 있다. 자책까지는 아니지만, 후회에는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마지막 상담을 마친 후에,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경위가 머리에 그려진 탓이다.

내가 어느 타이밍에 어떤 행동을 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 한걸음만 더, 좀더 나서서 챙겼어야 했다는 후회.

결국 이번에도, 요구에만 응하는 사람이었던 탓이었던게 아닌가.

요구 받은 영역 안에서의 최선이란게, 그 경계 안에 머물러 있는 내 입장일 뿐이고,

경계를 벗어나서 보면 그저 요구가 있을 때만의 필요최소한도의 응답일 수 있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먼저 요구할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멀고 어려운 사람인 게다.


심지어 나는 그 의뢰인의 특수한 성향과 불안과 갈등을 느낄만한 지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요구받은 일에 대한 최선,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딱 한걸음만 더, 나아갔어야 했는데.


그 아쉬움이 계속 목구멍에 걸려있다.

지나간 일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고질적인 성향의 문제라는 걸 잘 아는 지라,

현재 계속 중이고 여전히 재현되고 있을 동류의 상황들을 아쉬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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