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옵니다. 마주한 거울 속 얼굴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새 마음이 그 얼굴의 눈치를 살핍니다. 걱정이 되는가 봅니다.
그 얼굴이 밝은 날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해도 별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마음도 불편하고 불안한가 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얼굴이 애써 웃어 보입니다. 비구름이 가득한 날에만 일어날 기분 좋은 일들을 애써 떠올리려 하는가 봅니다.
# 업경대(業鏡臺)
거울이 존재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지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가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주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하루에 한 번 이상 거울이 비추어주는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거울의 존재 이유입니다.
세상 이후의 세계에도 거울이 존재한다고 하지요. 업경대(業鏡臺)라는 이름의 거울인데요. 불가에서는 망자가 세상을 떠나면 제일 먼저 마주해야 하는 게 이 거울이라고 합니다.
업경대가 하는 일도 마주한 이의 세상을 고스란히 비추어 보인다고 하는데요. 이승의 거울과 다른 점은 마주한 이의 삶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모두 비추어준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낱낱이 드러나면 전생에 지은 선과 복, 악과 죄업이 고스란히 밝혀지게 되는데, 그 후에 저울질이 시작된다고 하지요. 그리고 선과 복, 악과 죄의 무게에 따라 한 영혼의 사후 삶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업경대 앞에 섰을 때, 어떤 영혼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고통받는가 하면 또 어떤 영혼은 자랑스럽고 행복해한다고 하지요.
# 세상의 본성
예나 지금이나 어디를 가든 멋진 옷을 입고, 좋은 차를 몰고 오면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남루한 옷을 입거나 낡은 차를 몰고 오면 무시하는 세태입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속 사람은 보지 않고 겉사람만 보며, 흙수저나 금수저를 따지는 것이 세상의 미성숙한 본성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누구나 외모와 겉 꾸미기, 혹은 스펙 쌓기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세월은 흘렀어요. 사람 사는 방식이나 세태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든 자리와 서열 다툼은 여전히 만연하고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편 가르기 또한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재물이 많은 사람이 권력까지 함께 움켜줄 수 있는 세상은 앞으로도 현재 진행형이겠지요?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집회 3, 18.20.28.)
# 재상과 노승
고려 말 조선 초에 유명한 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문으로 19살에 장원 급제를 하고 20살에는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했으니, 그 자긍심과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그가 파주 군수로 가 있던 어느 날, 그곳에 존경받는 노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스님,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떤 덕목을 최고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해 주십시오.”
명분은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다 하지만, 속내는 자신을 시험하려고 왔음을 안 노승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십시오.”
그 말에 군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인데, 이렇게 먼 길을 온 저에게 그 말씀밖에는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노승은 그 어떤 반응도 없이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기왕 먼 길 오셨으니, 녹차나 마저 드시고 가시지요.”
그러자 군수는 마지못해 다시 앉았습니다. 그런데 찻잔에 녹차를 따르던 노승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넘친 찻물이 방바닥에 금방 흥건해졌지요. 화가 난 군수가 다시 노승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행동이시오? 지금 나를 모욕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노승은 빙긋이 웃으며.
“찻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른 군수는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맙니다. 그때 노승이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지요.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업경대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행위에는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 가시적인 얼굴과 비가시적인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요. 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중요하겠지만, 그 모습 뒤에 감추어진 의도와 속내가 더 중요하지요.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어서 성전에 가르치시는데, 많은 비유를 드시지요. 때마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모여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들 삶의 꼴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이시며 꾸짖으십니다. 업경대처럼 그들의 업이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 3-8.)
# 겸손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하고,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마르 9,35; 마태 20,27; 루카 9,48.14,11)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말의 어원은 ‘흙’(humus)입니다. 흙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처지와 다시 돌아 곳을 잊지 않는 사람의 태도가 곧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낮추되 비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알고 깨달은 자의 ‘자기 앎(인식)’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만이 오면 수치도 오지만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르고,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낮아지고 마음이 겸손하면 존경을 받습니다. (잠언 11,2; 18,12; 29,23 참조)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 2,3 참조)
참된 겸손은 의기소침하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참된 기쁨과 감사를 낳습니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낮춤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들어 높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자기보다 형제와 이웃을 높이는 것. 그것이 곧 벗을 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