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무엇을 원하는가

by 진동길



# “무엇을 원하느냐?”

사람들이 살면서 피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끌어당기는 이유는 부정문을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끊임없이 말한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I don't want to live in poverty."


“살이 안 쪘으면 좋겠어.”

"I hope I don’t gain weight."


말을 몇 마리 가진 이웃이 있었는데 하필 그가 말을 풀어놓는 곳에 학교 버스가 정차해 학생들이 말들에게 과자를 주곤 했다. 말들은 초코바나 감자 칩을 매우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자 말들은 눈에 띄게 살이 쪘다. 보다 못한 주인은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Don’t give the horses anything to eat.”)라고 쓴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먹을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표지판 문구를 바꿨다. "제발,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라고 썼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행사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긍정 심리학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을 알던 그는 나에게 문제를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요?”


나는 웃으면서 종이에 몇 마디를 적어 건넸다. 그는 종이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요! 정말 이걸로 문제가 해결될까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뒤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들은 평상시의 체중으로 돌아왔고 털에도 윤기가 흘렀다. 그의 목장 앞을 지나가면 이렇게 쓰인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과와 당근만 먹어요.”

“We only eat apples and carrots.”


단순하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다.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과가 있다. ㅡ앤디 코프, 앤디 휘태커, ‘자체 발광의 기술’ 중에서ㅡ


# 생의 절반에서


생의 절반쯤 왔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고,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가치 있는 길인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분이 물으셨다.


"......"


우물쭈물 대답을 할 수없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성찰 없이, 돌아볼 겨를 없이 너무 멀리 와버린 탓일까?


경쟁에 지지 않으려 내달린 길에서 때론 존재의 의미를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멀리 와버린 탓이다.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우리의 여정이 신의 사랑으로 시작됐다면, 보다 더 큰 가치와 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겠지. 아직은. 그래, 아직도 남겨진 시간이 더 많겠지...


# 섬기러 왔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오늘 말씀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나 나고 어떻게 다른 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여는 말씀에 이어지는 가르침입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의지는 자기희생적 사랑에서 시작되었지요. 반면에 인간의 생각은 자기중심적이며 불안한 자기 애착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애에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좌절과 절망,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높은 자리와 안전한 자리를 찾고 명예롭고 힘이 있는 무리에 속하려 하지요. 그런 자리와 그 무리에 속할 수만 있다면 엄마 찬스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들먹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말씀의 뜻은 ‘높은 사람’, 혹은 ‘첫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높은 사람이나 첫째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참된 ‘리더십(leadership)’과 참된 '관계의 정신'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의 존재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성 프란치스코도 ‘하느님의 겸손한 종’에 대해서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진하여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발아래 있기를 늘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영적 권고-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원수들에게도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비인준칙 16,11)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수도회칙 6,8)


하느님의 마음은 당신 자녀들 모두가 ‘높은 사람’, 또 ‘첫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의 마음이 그렇듯 하느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 의도와 뜻, 그리고 과정이 문제이지요.


신앙인들이 모두 ‘높은 사람’, 또 ‘첫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서로 종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높은 사람’, ‘첫째 사람’ 말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주인이 되는 나라이며, 종이 주인인 나라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닙니다. …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2코린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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