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스위치가 있어서, 어두워지는 저녁에 불을 켜듯 마음이 어두울 땐 스위치를 켜고 행복할 땐 잠시 꺼둔다. 방 안의 불을 꺼야 밖이 잘 보이듯 온갖 생각이 창궐하는 마음을 끄면 삶이 잘 보인다. -김미라, 마음 스위치 중에서-
# 바벰바족
남아프리카 부족 가운데 하나인 바벰바족 사회에는 범죄행위가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놀라운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나오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세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와서 그를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죄지은 사람이 과거에 했던 일이나 칭찬을 하게 됩니다.
즉 죄지은 사람의 장점, 선행, 감사, 미담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게 만듭니다. ‘넌 원래 착한 아이였어 ’, ‘작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떠내려가는 돼지를 건져 주었어’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물론 의도된 과장이나 농담은 금지됩니다.
놀랍게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비난이나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심 어린 칭찬의 말들을 한 마디씩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이 한 바퀴 돌기 시작하면 어느새 이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끼기 시작한답니다.
그때 그 마을 사람들이 다가가서 같이 울면서 껴안아 주고 위로하고 용서하는 이것이 이 예식의 절정이라고 합니다. 위로와 격려로 그의 죄를 용서해줍니다. 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죄를 지었던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들을 향해 미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강선영,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 중에서-
# 비난받는 예수의 삶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후,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랍비’(rabbi, 나의 큰 자)들처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가르치셨고 사도라 부르셨습니다.(마르 3,14)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부정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랍비)들과는 다른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형식적 율법주의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17).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하였습니다.
# ‘율법’(토라, תּוֹרָה)
예수님은 생명이 없는 마른 뼈와 다르지 않았던 구약의 율법에 생명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시고 완성하셨으며, 율법의 생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38-48).
‘율법’(תּוֹרָה)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생명의 법’(spirit, Ψυχή)이자 인간을 위한 ‘사랑’(soul, πνεύμα)이었습니다.
율법 조항 속에는 하느님의 뜻이 스며들어있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그분의 가르침 속에 한 자 한 자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언서 역시 위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계약의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이자 활력이었고 영적인 안내서이자 규범이 되었습니다.(로마 7,14) 한마디로 ‘율법’(תּוֹרָה)은 하느님의 ‘생명의 법’(spirit, Ψυχή)이자 인간을 위한 ‘사랑’(soul, πνεύμα)이었는데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이런 근본정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구속하는 장치로 전락하여, 왜곡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 말씀이 생명을 잃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형식만 남은 것이지요. 그것도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형틀과 다르지 않았지요.
잘못된 교리나 율법에 어긋나는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랍비들을 귀신 들렸다거나 더러운 영이 들린 자라고 몰아세워서 백성들을 현혹한 죄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죽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고(마르 3,6).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그런 위험이 닥치기 전에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21).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세우며, 꼬투리를 잡으려 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하며 신성모독자로 여론을 몰고 갑니다.
# 모든 율법과 계명의 완성-‘생명의 숨’(사랑, 성령, soul, πνεύμα))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호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예수님은 율법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시고자 하십니다. 사랑이 빠진 형식적인 법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에제 37, 2-3.5.)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영으로, 사랑의 숨으로,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을 완전하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으로 되살리려 하십니다. 마른 뼈에 생명의 숨인 사랑을 불어넣어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참조: 로마 13,10.)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시려는 사랑의 투쟁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처절한 창조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아버지의 뜻과 의지에 순명하는 길이었습니다.(요한 6,40)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었고(마태 5,43-48), 황금률을 지키는 것(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었으며(마태 7,12.), 가장 큰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되살리는(마태 22,37-40.)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있습니다.(마태 22,40)
#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
마른 뼈들을 살리고 앙상했던 가지에 푸른 잎과 꽃을 피울 수 있는 주님의 영(사랑)입니다. 사랑의 영은 율법을 완성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었습니다.
율법 안에 자신을 가두어두고 그것으로 타인과 자신을 묶어둔,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합니다.
소유물에 집착하고 나눌기를 주저하는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흩어지고 사라져버릴 생명이 없는 것들에 자신을 매달아 둔,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이신 분과 함께 사는 것임을 전해드립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