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사랑을 물어본다

by 진동길


# 스승의 주검을 도둑맞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지.

유다인들의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그들의 전통적 시간관념에 따라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각부터 다음날 토요일 해가 지는 시각까지가 안식일(샤바트, שַׁבָּת)이었어.(출애 20,10-11; 31,13-17; 신명 5,14-15.)

이 날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은 매우 엄격해서 신심이 깊은 유태인들은 이 날 전쟁을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했지.(1마카 2,32-38)

예수님 시대에는 병자를 치료하거나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까지도 금지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신앙이 좀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악법도 법이니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야.(마태 12,1-2.10.)

아무튼 향료를 준비한 여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분명 많이 애가 탔겠지.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간 첫날이 되자, 마음이 급한 여인들은 아직 어두울 때, 매우 이른 아침 무렵에 무덤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어.

한시라도 빨리 주님의 얼굴을 뵙고 향료를 발라드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무덤으로 걸음을 옮겼지.

여인들이 향하고 있는 무덤은 세상에서 마지막 거처이자 산 이와 죽은 이를 가르는 장소이지만, 그곳은 또 눈부신 삶이 증명되고 확인되는 현장이지.

드라마틱하게도 죽음은 인간에게 스스로 모든 의심을 버리게 하지. 죽음은 침묵으로 부정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진실을 말해주니까. 거부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가장 큰 가르침 말이야.

그런데 새벽 걸음을 재촉하는 여인들에게 한 가지 큰 걱정이 있었어. 동굴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 때문이었는데.

그 동굴 무덤은 아리마태아 출신의 의회 의원, 요셉의 소유였지. 그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했고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그분을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았던 것이지. 고증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돌의 무게는 대략 1.5톤에서 2톤이나 되었다고 하더라고.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여인들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무심코 내뱉어진 말에 여인들은 대책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지. 그러다가 눈을 들어 무덤 입구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는 거야.

의심 많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갈까 봐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진흙을 이겨 틈새를 봉한 무덤이었는데 말이지.(마태 27,57-60; 마르 15,42-46; 루카 23,50-53; 요한 19,38-41.)

여인들은 기겁했지. 당연히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까 더 놀라운이 일이 일어났는데.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앉아 있더래. 여인들은 또 한 번 기겁했지. 그때, 그 젊은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데.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이야.(마르 16,6-7.)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어. 덜덜 떨면서 말이야. 겁에 질렸던 것이지.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자기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마르 16,8.)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여인들과 달랐어. 그녀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는데, (마르 16,9.) 그녀는 그 길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말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갔지.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어.

그리고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어. 그도 두려웠던 거지. 곧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왔고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던 거야.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무덤이 비워진 것을 확인하게 되고.

생전에 믿고 따랐던 스승을 십자가에서 잃고 이제는 그분의 주검까지 도난당했으니. 두 제자는 더없이 허탈하고 슬픈 마음만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요한 20,1-10.)

# 당신은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제자들은 그분과 수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 하며 직접 그분의 가르침과 하신 일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런 제자들도 예수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요한은 말합니다.(요한 20,10.) 아직까지는.

어쩌면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대상의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당신은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라는 질문보다 처음부터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게 더 현명하겠지요.

아니, 그 이전에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라는 질문부터 시작되어야겠습니다.

아니,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 인간에게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라는 질문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그대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당나귀 같은 우리 자신에게는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십니까?"라는 질문도 추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혹시 "당신을 향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신 적은 있나요?"

"당신 자신마저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그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타적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자가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확증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생명이시기에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사랑의 확증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 그 자체마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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