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 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 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을 했는가?”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 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 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 인정의 욕구
“잘했어! 정말 대단한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 꼭 필요한 절대적인 ‘심리적 욕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정의 욕구. 그것은 자기가 생존할 이유를 확인받는 것이기에 어떤 이에게는 생명만큼 중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찾고 있으며, 이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면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분석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성공?
한 정치인이 살아 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마더 테레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데레사 수녀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성취욕
심리적으로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고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하는 ‘인정의 욕구’. 그리고 이와 같은 선상에 있는 욕구 하면 ‘성취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영향도 주지만, 행동 심리학의 권위자인 미국의 데이비드 매클렐런드(1917~98)에 의하면 경쟁 사회에서는 비신사적 행동이나 교활한 협상과 그런 기술을 저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조: 남윤호, 성취욕 -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군자가 아니겠는가.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갈고닦는 데 힘썼고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남에게 인정받는 데 힘쓴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해야 함이 옳지 않은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 16장-
# 행복과 사랑의 역학
신. 절대자. 행복과 사랑이신 분. 그분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게 무엇일까? 예수님의 기적에는 어떤 뜻이 있었을까?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과 사랑의 ‘역학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나만 생각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눈물 흘릴 때가 많습니다. 이웃이나 세상을 위해서. 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일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며 자신이 이룬 결과나 자신이 하는 행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던 바리사이들을 멀리하셨지요. 오히려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며 자신을 낮춘 세리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것도 자기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 우리의 강박증’이 아니라 ‘그 무엇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남김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지요.
# 또다시 사랑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닌 길이 남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자 자신과 타인, 또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기름.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임을 오늘 다시 명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존재하십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되는 것’ 임을. 내가 사랑이 되었기에 사랑하고 있는 것임을.
마치 태양이 우리에게 빛과 따뜻함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따뜻함'이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도 빛과 따뜻함, 사랑이기에 영원히 남겨지기를 기도합니다.
태양이 우리를 살리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 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존재 그 자체로 살아있는 그것만으로 아름다움과 향기를 주는 꽃들처럼, 생명을 살리는 공기처럼 말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또 무엇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썩어 없어질 것에 힘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심을 믿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기를 원하기보다 사랑 자체이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사람의 아들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묵시 1,17c-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