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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Apr 23. 2021

소금단지

사랑의 나눔


# 가슴으로 한 사랑

내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나와 함께 부활하셨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만일 그랬다면 그때 당신은 사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내어놓았을 때입니다.


# 머리로 한 사랑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0. 65-66.)

# 성 안토니오와 노새

성체의 기적은 13세기에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통해 완고한 이교도를 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보노닐로’라는 이름의 이 이교도는 ‘이교도들을 때리는 망치’라는 별호를 가진 ‘성 안토니오’의 설득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보노닐로는 그의 옆에 서 있던 노새만큼이나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노세에게 시선을 주면서 보노닐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에 이 노새가 무릎을 꿇고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 조물주께 예를 드린다면 이단을 버리겠느냐?”

이교도는 ‘몇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말한 조건이란: 이틀 동안 노새에게 먹이를 주지 말며, 사흘째 되는 날에는 그놈을 넓은 운동장으로 끌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 운동장 한옆에는 구미를 돋우는 신선한 먹이를 많이 놓아두고, 다른 한 옆에는 성체를 안토니오가 들고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괴상한 시험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보노닐로는 조소하는 얼굴로 배가 몹시 고픈 노새를 끌고 도착했습니다. 노새가 그동안 굶었으니 식욕이 왕성해져 먹이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한편 안토니오는 연이틀 동안 이 이교도의 영혼을 위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열성적인 종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끈이 풀리자 노새는 주저하는 빛도 없이 안토니오 성인 쪽으로 다가가더니 성체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모습은 성체 앞에 경건하게 조배 하는 태도였습니다.

이를 본 고집 센 이교도 보노닐로는 물론 그 운동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모두를 당혹게 하는 사건이자 성체의 기적이었습니다. 고집 센 이교도 보노닐로도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그동안 성체를 모독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회개하였습니다.

# ‘그릇’-몸(בְּשַׂר: σῶμα)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바사르(בְּשַׂר): 소마(σῶμα)]은 ‘살, 인간, 인간관계, 혈연관계’를 말합니다.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하지요.

‘피’[담(דָּם); 아히마(αἷμα)]는 ‘생명’을 말합니다. ‘새로운 계약’, ‘일치와 유대’를 일컫지요.

우리의 '몸'(그릇)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담깁니다. 이처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운 기적이 또 있을까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과 ‘피’가 내 안에 담기는 일입니다. 아니 내 ‘몸’과 하나가 되는 기적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 ‘온전히’, 그리고 ‘오롯이’ 나와 하나가 되고자 하십니다.

성체성사는 낡고 죄 많은 인간이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와 온전한 ‘일치’이자 ‘사귐’이요.

거룩한 현존 안에 ‘머무름’입니다. 신비스러운 몸에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됨이지요.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내 안에서 다시 새롭게 흐르려 합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사랑이 새로운 생명으로 흐르려 합니다.

이해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한 뒤에 이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믿을 수 있기를.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사랑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사랑은 사랑하는 이 안에서 깨어나는 기적을. 그 신비를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기에.

사랑을 앞세운 이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기에. 그것은 기적이기에.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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