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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Apr 30. 2021

소금단지

침묵의 소중함


# 침묵의 소중함

미국 듀크대 재생 생물학자 키르스테(Kirste)는 네 그룹의 생쥐에게 각기 다른 소리를 들려주었다.

음악, 아기 생쥐가 부르는 소리, 백색 소음, 침묵이었다. 과연 두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가설은 '음악이나 노랫소리에 두뇌는 활성화되고 성장한다.'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가설을 뒤집었습니다. 아기 생쥐가 부르는 소리에 뇌세포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활성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지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른 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침묵은 달랐다. 침묵 중에 있을 때, 두뇌의 기억을 관장하는 부위인 해마 세포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침묵과 명상의 긍정적인 효과는 이태리 파비아대 베르나르디(Bernardi) 교수의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에게 6가지 음악을 차례로 들려준 뒤 혈압, 심장 박동, 호흡 수 등을 살핀 결과 장르에 상관없이 템포에 비례하여 혈압과 심장 박동, 호흡 수가 움직였는데,

놀랍게도 음악이 바뀔 때마다 2분간 멈추는 구간에서 혈압, 심장 박동, 호흡 수 등 가장 많이 떨어지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지요.

# 덜어내자

우리 삶을 흔들고 스트레스와 긴장을 유발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겠지요.

육체적 결핍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고 정신적 결핍은 내면적 욕망을 쥐락펴락합니다.

결국 우리의 부정적인 행동 패턴은 결핍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안에서 소화되기도 전에, 내 안에서 익어가기 전에, 결핍된 욕구와 욕망에 사로잡혀 무조건 채워 넣고, 무조건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 작은 나무 조각

한 형제가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형제의 어머니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요. 두레박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마다 늘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두레박에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형제가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을 퍼 올릴 때, 이 작은 나무 조각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된단다.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반 통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

내 안에서 일렁이는 파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두려움과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들. 소유하려 조바심이 일어날 때마다.

그 파도 앞에 주님의 말씀을 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과 함께 말이지요. 말씀은 기쁨과 평화와 희망, 그리고 생명을 일으킵니다.

‘생명의 말씀’은 우리를 침묵으로 이끕니다. 생명의 말씀은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 ‘사랑의 속삭임’은 내 영혼에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선물합니다. 그것은 곧 기도가 되지요. 내 안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는 기도 말입니다.

T.V와 휴대폰을 잠시 꺼두시면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은 덤입니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 말씀

‘말씀’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사랑의 속삭임’이 주님을 뵙게 하고 그분을 알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더 사랑하게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성령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기에 그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요한 8,31-32 참조)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기쁜 말씀, 생명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뵙고 하느님을 뵙습니다. 말씀으로 주님의 ‘삶’을 ‘보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 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여 달라’(δεῖξον)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보는 것’(ἑώρακεν)을 가르치십니다.

우선 오늘 예수님께서 쓰신 ‘보다’(ἑώρακεν)라는 말과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의 ‘보다’(δεῖξον)는 말이 뜻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는 רָאָה [라아, râʼâh: 창세 7,1; 탈출 2,2; 4,18, 시편 16, 10; 27,13; 64,6.]입니다.

이 말은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 말합니다. 복음에서 그리스 말로 ὁράω; ἑώρακεν(능동 3인칭) [호라오, hŏraō: 루카 17,22; 요한 1,50; 3,36; 8,5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경험하다, 목격하다, 영적으로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8)라고 말할 때의 쓴 ‘보다’(δεῖξον)라는 말은 δεῖξον[데익손, deîxon; 전시하다, 보여주다, 드러내다, 표현하다, 밝히다, 알리다, 설명하다, 알게 하다, 가르치다, 입증하다]라는 말이지요.

즉 필립보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눈’으로-현상으로-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표현하거나 설명하여 알게(γνωρίζω) 해 주십시오.” 혹은 “아버지를 입증해주십시오.”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다’라는 뜻에는 “찾아내다. 관찰하다. 경험하다. 영적으로 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나를 보고, 내가 한 일을 보고 아버지를 알아보라(γνωρίζω).”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

“내가 한 일들을 보고 알아라(γνωρίζω).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아버지의 현현이다. 내가 아버지임을 알아라. 내가 아버지임을 믿어라.”라는 말씀입니다.

# 앎(γνωρίζω, know)

“너희가 나를 알게(γνωρίζω)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기쁜 소식으로 주님과 아버지를 알아갑니다.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려 주고 알아가는 여정이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야겠다는 의지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을 부정하고 지워낸다는 것은 어제와 지금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지워내는 것이기에.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 따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이미 알게 된 진실, 이미 본 진실 앞에서 ‘자기부정’은 시기의 문제일 뿐. 알아야 하는 것, 이미 알아버린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

진리이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앎의 여정’이 계속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부정. ‘자기 더하기’가 아닌 ‘자기 빼기’를 통한 여정 말이지요.

더하기가 아닌 지우기를 통해서. 소유가 아니 나눔과 덜어내기를 통해서.

‘참된 봄’, '참된 앎'에 이를 수 있기를. 끝이 없는 여정일 수 있습니다. 비로소 깊은 사람, 비로소 넓은 사람, 비로소 큰 사람이 되기까지. 어제의 나까지도 지워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여정이겠지요.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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