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 말합니다. 복음에서 그리스 말로 ὁράω; ἑώρακεν(능동 3인칭) [호라오, hŏraō: 루카 17,22; 요한 1,50; 3,36; 8,5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경험하다, 목격하다, 영적으로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8)라고 말할 때의 쓴 ‘보다’(δεῖξον)라는 말은 δεῖξον[데익손, deîxon; 전시하다, 보여주다, 드러내다, 표현하다, 밝히다, 알리다, 설명하다, 알게 하다, 가르치다, 입증하다]라는 말이지요.
즉 필립보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눈’으로-현상으로-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표현하거나 설명하여 알게(γνωρίζω) 해 주십시오.” 혹은 “아버지를 입증해주십시오.”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다’라는 뜻에는 “찾아내다. 관찰하다. 경험하다. 영적으로 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나를 보고, 내가 한 일을 보고 아버지를 알아보라(γνωρίζω).”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
“내가 한 일들을 보고 알아라(γνωρίζω).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아버지의 현현이다. 내가 아버지임을 알아라. 내가 아버지임을 믿어라.”라는 말씀입니다.
# 앎(γνωρίζω, know)
“너희가 나를 알게(γνωρίζω)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기쁜 소식으로 주님과 아버지를 알아갑니다.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려 주고 알아가는 여정이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야겠다는 의지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을 부정하고 지워낸다는 것은 어제와 지금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지워내는 것이기에.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 따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이미 알게 된 진실, 이미 본 진실 앞에서 ‘자기부정’은 시기의 문제일 뿐. 알아야 하는 것, 이미 알아버린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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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이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앎의 여정’이 계속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부정. ‘자기 더하기’가 아닌 ‘자기 빼기’를 통한 여정 말이지요.
더하기가 아닌 지우기를 통해서. 소유가 아니 나눔과 덜어내기를 통해서.
‘참된 봄’, '참된 앎'에 이를 수 있기를. 끝이 없는 여정일 수 있습니다. 비로소 깊은 사람, 비로소 넓은 사람, 비로소 큰 사람이 되기까지. 어제의 나까지도 지워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여정이겠지요.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