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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01. 2021

소금단지

그대 안에 머물다


# 머물다: μένω(메노)

“머물다μένω”(거주하다, 머무르다, 남다, 묵다, 기다리다, 쉬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교부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서로 ‘상호-침투(浸透)’, ‘상호-훈습(熏習,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περιχώρησις)’하시는 분이라 하셨지요. 서로 ‘한-마음’, ‘한-몸’, ‘한-뜻’의 관계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내가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됨을 말합니다. ‘그가-내-안-있고’ ‘내가-그-안에 있는 것’. 함께 숨 쉬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지요.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생명이 되어 가지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 것에 묶여있으면 언젠가 그것이 넘어지는 날 같이 넘어질 것이지만, 영원한 아가페 사랑과 하나 된 사랑은 스러질 날도 없겠지만,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요. 저기 밤하늘의 별들처럼 말이지요.

내 안의 욕망이 청하는 기도와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러면 지금 당장 내게 급한 일이 무엇인지 아시는 그분께서 내 급한 일도 열매 맺어주시리라 믿습니다.

# 마음을 읽다

옛날에 글을 배우지 못한 여자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갔다. 해가 갈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했지만, 시부모를 도와 농사짓고 살림을 꾸리느라 고향에 다녀올 엄두조차 못 냈다.

하루는 고향에 있는 친정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할 요량으로 종이를 펼쳤다. 그러나 글을 몰라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고민하던 여자는 글 대신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완성된 그림은 간단했다. 커다란 굴뚝과 훨훨 나는 새 한 마리가 다였다.

며칠 뒤 고향에 편지가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은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편지를 보냈을까?’하고 의아해하며 편지를 뜯었다. 굴뚝과 새 그림을 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뜻을 생각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때 여자의 친정어머니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시집간 딸에게 온 편지를 내밀며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래요?” 편지를 본 친정어머니는 이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올 새가 없다는 말이랍니다.”

단번에 딸의 그림을 읽은 어머니처럼, 서로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은 천리 길도 잇는다.   -'좋은 생각'에서-

# 사랑은 암호 같은 것

‘사랑’은 현존이고 친교이고 만남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3자의 시선에서는 암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된 암호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밀떡이 그것을 초월한 사랑의 약속이자 생명의 빵으로 실재하듯이.

사랑은 언제나 눈으로 보이는 그것과 다른 모습으로, 그 현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무엇이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현상을 일으키는 실재가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쪼개진 생명의 빵에서 천국을 보고 천국의 삶을 그리워하듯. 사랑은 실재와 다르게 실재하는 것 같습니다. 저 너머에서 '보이는 것(현상) 그 너머' 실존 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빵(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빵 속에 감추인 생명. 그 실재와 만날 수 있기를. 빵 속에 녹아있는 ‘사랑’과 ‘생명’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오늘 하루만, 단 하루만이라도 그분과 함께 머무르고 싶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면서 말이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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