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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23. 2021

소금단지

행복


# 행복? 소유? 향유?

사과를 한 개 가진 사람과 두 개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

누구나 "두 개를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명확하고 현실적인 답은 사과의 갯 수에 있지 않고 사과의 맛에 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한들 사과 먹는 사람에 비교할 수 없다.

사과는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맛을 느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당신은 행복한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에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행복에 대한 사실적이고 거짓 없는 답은 이성이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내 감정이 응답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 행복의 역설

그렇다면 행복은 소유가 아닌 향유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과를 열개 가지고 있지만,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사람과 달랑 사과 한 개 가졌지만,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더욱이 달랑 사과 한 개라면 그 맛은 매우 달콤하겠지!

행복에 대한 문제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해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물리적으로 많고 적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행복! 지금!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들과 스스로 그것을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

# 행복 선언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에 대한 다음과 같이 선언을 한다.

"행복하여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행복. 그리고 가난한 영과 하늘나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영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궁금증을 풀어내기 위해서 예수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예수는 알고 또 그가 선포한 말씀도 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곧 그의 인격이고 사상이며 철학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예수의 삶은 그야말로 '영이 가난한 사람'을 대표한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 병자들과 상처 받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자신의 삶을 나누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영이 가난한 삶'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이들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영이 가난한 삶'을 선포하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 죽어갔던 한 사나이.

정말 행복했을까?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장 큰 난관이 육체의 고통과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한 많은 장애우들에 의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행복을 앗아가는 씨앗들은 지구인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불행한 명분과 이유를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만, 그 사연들의 공통분모는 '두려움'이 가장 많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와 죽음, 잃고 싶지 않고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 더 소유하고 싶고 채워야 할 것 같은 심리 등등. 불행이라고 딱지 붙여진 삶의 저변에는 항상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 가난한 영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의 삶은 그 생명이 세상 밖으로 피투 되던 날부터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 노출되었다. 먹고 먹히는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자연스러운 운명다.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려운 대상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고 유지하고 살피며,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야만 했다. 공포와 두려운 대상으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선언하였다. "행복하여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하늘나라는 무엇일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떤 삶이 하늘나라의 삶일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답은 있다. 그 나라를 선포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된다.

그는 죽음을 맞이 하기 전,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죽을 줄 알고 있었다. 그도 두려웠다. 피땀을 흘릴 정도로.

그런데도 그는 죽기까지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기름지고 거짓된 영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성전을 정화하듯, 가난한 영을 더럽히는 원인들을 떨쳐버렸다.

"행복하여라, 영이 가난한 사람들!

아버지의 영은 가난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의 영은 가난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부추긴다. 소유가 아닌 향유, 채움이 아닌 나눔, 움켜쥠이 아닌 내려놓으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소유하려 하는 혼은 물질뿐만 아니라 형제와 이웃까지 손아귀에 쥐고 싶어하고 조종하며 관리하려 든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가난한 영은 자유와 사랑을 먼저 생각한다. 그 행위가 비록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가난한 영의 주인이었던 그의 삶이 그랬다.

성령. 예수의 가난한 영은 오늘도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세상을 향해 선포한다. 채우려는 마음을 멈출 때, 내게 주어진 은총에 감사할 수 있고, 움켜쥔 손을 펼칠 때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사과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라고... 인생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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