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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24. 2021

2021

5월 24일


예보에도 없던 비가 아침의 습하고 낮은 기온을 틈타 창문을 드린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안 좋은 생각이 가중치를 더하고 더한다.

 주위에 누가 말을 걸어오면 바로 냉랭하고 신경질적인 미사일을 선전포고 없이 쏘아붙일 것 같다.

실 내 안에서 내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인생관에서 시작된 사격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들은 물론 미화된 기억들까지 폭파시키기에 충분하다.

내 안을 살피는 레이더는 파괴되었고, 현와 과거를 넘나드는 폭격기는 통제심과 인내심을 집중 공격한다.

내장된 핵폭탄은 언제든 내 심장 속에서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자폭장치는 오늘 같은 날에는 자동으로 작동한다.

해일과 폭풍이 일고 급기야 시한폭탄이 작동되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용기를 낸다. 처방받은 약이 어디에 있는지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다. 살기 위해서다.

살아야 할 이유는 딱히 없지만, 꼭 한 가지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면 나 없이는 밥도 못 얻어먹을 장애 고양이 '마리'를 홀로 버려두고 갈 수 없어서다.

약은 처방받은 지 여섯 달이 지났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이거라도 먹고 일어나야 한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도 있지 않는가.

내전으로 무너진 마음은 곧 복구되겠지. 흩어졌던 영혼도 돌아오겠지. 떠나갔던 희망도 혹시 미련 때문에 돌아올지도 몰라. 그래. 다시 기다려보자. 일어설 수 없다면 이렇게 누워서 눈이라도 뜨고 있어 보자.

내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영혼이 자비를 청한다는 것은 염치없고 면목없는 일일 테지.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마야 안젤루. 시인이자 작가이며, 가수 등등. 수많은 커리어를 가진 인권 운동가. 그녀의 이야기와 그녀의 대표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녀는 '용기 있고 강한 자아구나. 경이롭다.'라는 생각을 했다.

전차 운전사, 뮤지컬 배우, 스트립 댄서, 문학 교수, 자동차 정비공.... 한 사람이 저렇게 많을 인생을 살아낼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내 심정은 그녀의 글과 삶으로부터 한 줌의 희망과 힘도 건져내지 못했다.  

너무도 강한 자아. 선동적으로 포장된 언어들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비만 와도 흔들리고 축축 처지는 내게 그녀의 글들은 상대적 자괴감만 주고 있었다.

#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 마야 안젤루

너의 그 심하게 비틀린 거짓말로,
너는 나를 폄하해 역사에 기록하겠지
너는 나를 아주 더럽게 짓밟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먼지처럼, 나는 일어날 거야.
나의 당돌함에 네 속이 불편한가?
왜 너는 찌푸리고 괴로워하지?
내가 거실에서 솟아나는 기름을 바른 듯
당당하게 걷기 때문인가.
태양처럼 달처럼,
밀물과 썰물처럼 분명하게
높이 솟구치는 희망들처럼
그래 나는 일어설 거야

ㅡ중략ㅡ

부끄러운 역사의 오두막으로부터
나는 일어서리
고통의 뿌리인 과거로부터
나는 일어서리
나는 검은 바다, 뛰어오르고 퍼지고,
파도 속에 솟구치고 부풀어 오른다.
테러와 공포의 밤들을 뒤에 남겨두고
나는 일어서리
놀랍도록 선명한 여명을 향해
나는 일어서리
나의 선조들이 내게 준 선물들을 안고서
나는 노예들의 희망이며 꿈이니.
마땅하고도 당연하게
나는 일어서리
나는 일어서리
나는 일어서

# 하지만, 그래. 나도 일어나 보자./ 진동길

아무도 나를 비난하거나 혐오하지 않았다.
그토록 심하게 나를 거짓말로 현혹하고
비난하며 더럽게 짓밟은 이는 나뿐이다.
그래 나도. 먼지처럼, 일어나 보자.

당돌했던 그녀의 인생처럼,
거실에서 솟아나는 기름을 바른 듯
당당하게 었던 그녀의 걸음처럼
그래 나도. 일어 서보자.

아무도 내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길 원하지 않아
아무도 내가 고개 숙이고 눈을 내리깔기를
아무도 내 어깨가 축 처지기를 원하지 않아
누구나 다 힘들고 지쳐있어
너의 어깨까지 눈여겨볼 여유가 없어.

차라리 웃어봐
미소 짓는 얼굴에
비난하는 말을 뱉어낼 사람도,
살기 띤 눈빛으로 너를 조각낼 사람도,
증오하는 표정을 지을 사람도 없어.

살다 보면 살아진다잖아
느껴봐 초록 잎과 물 살을
걸어봐 바다와 숲 속을
들어봐 새소리와 바람의 소리를
맡아봐 흙과 나무들의 냄새를

절뚝거리더라도 걸어보자.
두어 걸음 걷다가 힘겨우면 앉아 쉬고
따가운 햇살 아래 땀을 흘려도 좋아

어두컴컴한 이 숨 막히는 방에서 나가자
문지방에 발가락이 찍혀도 좋아
아픔을 느낀다면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니까
나가자. 일어나서. 나도 일어 서보자.

마야 안젤루처럼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냥 걸으면서
느끼고 듣고, 보기만 해도 돼.
배고프면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자.
달달한 자판기 커피 한 잔만 마셔도 좋아.
나가자. 일어나서. 나도 일어 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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