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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30. 2021

2021

5월 30일


서시/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상담실은 여느 가정집 거실처럼 꾸며져 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상담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효과이겠지만, 나는 매번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웠고,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아무리 꾸며도 여기는 폐쇄된 공간이고 닫힌 공간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쓴 꿈 이야기를 이미 메일로 받았고 그것을 프린트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휘리릭, 속독으로 읽고 몇 군데 밑줄을 치는 것 같지만, 별 반응은 없다.

"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그녀는 시큰둥 물어보며 지난번처럼 받아쓰기 준비를 한다.

"윤동주의 서시와 '신부는 총알 사이를 걸어 다녔다.'는 사진이 제가 이 길을 선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동기가 됐어요. 사진을 처음 본 것은 성소 모임에서였고요."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고 그녀의 받아쓰기도 순간 멈췄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둘 사이에 자리를 틀고 앉았고 나는 순간 기억 저장 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걸 느꼈다. 병목현상이다. 신학교에서 기말 시험을 칠 때마다 느꼈던 익숙한 현상이다.

그때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 또 교수 신부님은 어떤 문체를 좋아하실지가 시험문제보다 더 큰 문제다. 지금도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정답이 없는 논술시험 같은 인생 이야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고, 반대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릴 수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 중이다.

"그때는 그랬어요. 그 사진과 사진 아래에는 '신부는 총알 사이를 걸어 다녔다.'라고 적혀 있었고, 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 사진을 선택했죠." 나는 합판으로 된 상담실 벽 너머, 공인중개소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얼굴 없는 남자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무심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음 설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저 벽 넘어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소수의 청자가 있는 것도 상관없지.'

"강렬한 끌림이었어요.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하고 선 것 같은 느낌? 예. 맞아요. 그때는 그랬어요. 명료했고 명확했어요. 풀리지 않던 인생의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된 기분이었죠. 날아갈 듯했어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수학 문제가 아주 단순 공식을 대입했는데, 척 하니 풀렸을 때 느낌 아시나요?

'신부는 총알 사이를 걸어 다녔다.' 너무 명쾌하지 않나요? 사진과 사진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어요.

나는 왜 사제의 길을 가려고 했는가? 혹시 신분 상승을 위해? 아니면 시쳇말로 폼나 보이고  멋있게 보여서? 그것도 아니면 학습욕구? 하느님과 신, 종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서? 등등.

'신부는 총알 사이를 걸어 다녔다.' 사이다 같지요? 시원하지요? 내 안에서 발효되던 온갖 부정적인 거품들. 딴지 걸듯, 시비 걸듯, 비아냥대던 온갖 잡스런 질문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었죠.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위대한 발견이었어요. 저는 자유로운 구속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때는...

현타(현자 타임) 왔다는 말 아세요? 그때는 정말... 현타가 왔다는 표현이 적절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랬죠.

나도 누군가를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죽음 앞에 선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저 사진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꼭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 확신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의심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그때는 그랬어요. 죽음보다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절박하다고 믿었어요.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죠?"

내가 이야기를 멈추자 그녀도 받아쓰기를 멈췄다. 나는 그녀를 만날수록 궁금해졌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아니, 누구를 위해 저렇게 열심히 내 이야기를 받아쓰기하는 걸까?

범죄자와 프로파일러의 상담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까? 마치 로봇처럼 질문하고 난 후, 토씨 하나 빼먹지 않으려고 받아쓰기하는 그녀는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걸까? 굳이 비싼 상담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이런 상담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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