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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19. 2021

소금단지

변화와 변질


# 신은 죽었다.


“우리는 그를 죽였다. 너희와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그대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될 것이며, 더 이상 흠숭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끝없는 신뢰 속에서 휴식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내 마음에는 더 찾아서는 안 되고 발견해야만 하는 곳에서 아무런 안식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체념의 인간, 그대는 만사 속에서 체념하려고 하는가? 누가 그대에게 그것을 할 힘을 주겠는가? 어쩌면 체념이 체념 그 자체를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제공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이 거기서부터 항상 더 높이 올라가게 되어 더 이상 한 하느님 안으로 흘러 떨어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니체, 즐거운 과학 중에서-


니체의 사상은 초인(超人)에 의한 힘으로의 의지였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위험을 겁내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의 힘에 의지합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체념을 하면, 그 체념이 인간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 통제 욕구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에제 28, 2.)


"‘control’이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들 통제 혹은 지배(공학에서는 제어)라고 번역한다. 심리학에 자주 등장하는 이 용어의 쓰임은 주로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사건, 혹은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관련이 있다." -김정인 생활 속 심리 이야기-


심리적 통제가 선한 의지와 만나 자기에게로 향할 때에는 내적 자기 변화와 경이로운 성취를 이룰 수 있고 새로운 삶과 세상을 위한 창조적 동기와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 통제력이 잠재된 악의와 결핍된 욕망이나 욕구와 혼합될 때, 우리는 자기-자신도 몰랐던 상상할 수 없는 괴물과 만날 수 있는데, ‘양복을 입은 뱀’(Snakes in Suits)이 그런 괴물 중에 하나이다.


괴물은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의 결핍을 타인을 향해 겨냥하고 힘과 권력과 같은 주어진 수단과 능력을 활용해 타인을 통제하려 한다.


위선, 거짓, 사기, 매수, 고문, 폭력, 위협, 협박, 살인, 전쟁 등... 심리적 내ㆍ외적 감금과 조종에 의한 통제 욕구는 교묘하고 교활해서 이웃과 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기만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 5).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 스스로 신이 되어서 신과 같은 힘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니체처럼 초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현대판 바벨탑을 세우고자 하지요.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 4).


# 변화


물질의 상태는 항상 고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하는데요. 이를 '상태변화'라고 합니다. 고체에서 액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가 되기도 하며, 또 그 반대의 과정을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모든 물질은 상태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 상태의 변화는 일반적이지 않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서 원래 그 물질의 본질과 전혀 다른 상태나 물질로 변화되기도 하지요.


대표적으로 찬석, 혹은 금강석이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광물의 예를 들어볼까요?


다이아몬드. 이 광물의 어원은 '길들일 수 없는, 무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ἀδάμας(Adamas)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의 원소는 탄소입니다. 연필과 연탄처럼 불에 잘 타는 탄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탄소가 완전히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되어서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쓰임새가 완전히 다릅니다.


# 존재(상태)의 변화


영원을 상징하는 존재. 무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존재. 귀부인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로 상태변화를 일으킨 탄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한순간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곧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는 연탄과 같은 탄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태로 기억되고 남겨지고 싶습니까? 다음 이야기를 묵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황량한 길을 걷다가 미친 코끼리에 쫓겨 도망치다 하필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 밑에는 설상가상 네 마리의 독사가 살고 있었지요.


다행히 이 사람이 엉겁결에 우물 위 칡넝쿨을 붙잡기는 했습니다만, 밑으로 내려가자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있고, 다시 위로 올라가자니 미친 코끼리가 딱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겨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검은 쥐 흰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절망적이지요.


그때 마침. 절망감에 빠져 있는 이 사람에게 칡넝쿨에서 꿀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꿀 맛입니다. 이 사람은 위급한 상황을 까마득히 잊고 꿀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데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하지만 짧은 이 비유 속에 상징적인 의미들이 들어있는데요.


비유에서 황량한 들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물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영혼'입니다. 또 미친 코끼리는 죽음을 의미하고 독사는 우리의 육신을 의미하고 있으며, 두 마리의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세월, 마지막으로 칡넝쿨과 꿀은 인간의 다섯 가지 육신의 욕락(色, 聲, 香, 味, 觸:  재욕(財欲) · 색욕(色欲) · 음식욕(飲食欲) · 명욕(名欲) · 수면욕(睡眠欲))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원하지도 못하고 고정된 실체도 아니어서 황량하고 절망적인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애착과 집착의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결핍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독사와 같고, 도적 같은 유혹자에 속아서 말이지요.


# 새로운 변화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4,35.)


상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야 할 때입니다. 꿀 맛에 취해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연탄으로 살아갈 것인지. 금강석이 될 것인지. 칡넝쿨을 타고 올라가서 코끼리와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잠깐의 달콤함에 빠져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유혹자는 말합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소유하여라.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오르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저녁은 찾아오고 누구나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야 할 날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부터 생명의 주인과 함께 한다면 호수 저편의 삶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생ㆍ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분과 함께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도 인생이라는 바다에 돌풍이 일 때에도 나와 그리고 우리와 한 배를 타신 분이 살아 계심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 두 부류의 리더


세상에는 두 부류의 리더가 있습니다. 주어진 권력과 힘으로 자신의 결핍된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주변을 지배하고 컨트롤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의 인격으로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참 주인이시면서 스스로 종이 된 이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세상의 참주인이 우리의 종이 되셨습니다. 생명과 세상의 섭리자께서 우리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돌풍이 이는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배  위에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작정하셨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2코린 5,14.)


오늘날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세상 곳곳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죽었다. 네가 이제 세상의 주인공이다. 네가 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참 주인의 삶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주인 행세를 하는 종을 섬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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