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동길 Nov 01. 2020

여자, 정혜

《여자, 정혜》(This Charming Girl), 2005년.

감독: 이윤기

제작: 엘제이 필름, (주)필름북

각본: 이윤기, 정소현

원작: 우애령     


# 여자, 정혜     

우체국 카운터 안에서 조심스럽게 세상을 내다보는 여자, 정혜. 기억 속에 가둬 둔 트라우마들을 혼자 쓸어안으며, 회색 빛 얼굴로 혼자 그렇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낯선 사랑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너무도 익숙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친숙한 기억 속의 트라우마. 성을 짓밟힌 익명의 여성들처럼, 절망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그녀는 자물쇠를 잠그고 서너 번 확인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다.     


여자, 정혜. 그녀는 아프다. 아픈 여자다. 너무나 아프고 외로워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무표정하게 대한다. 하지만 희ㆍ노ㆍ애ㆍ락이라는 언어를 잊은 것은 아니다. 무감각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서적인 자극들을 현실 세계로 들여보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무료하게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속에서도 그녀의 기억을 건드리는 자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가 그녀의 발을 핥을 때는 엄마가 발톱을 깎아주던 정겨운 오후가 생각났고,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녀에게 유일한 의지처였던 엄마의 죽음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 재혼을 알려온 전남편과의 어색한 만남은 남편의 일방적인 성관계로 인해 신혼여행이 이별 여행이 되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쓰라린 자극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원래, 기억하기 싫은 것만 자꾸 생각나는 거야."(병원에서 엄마의 말)     


그리운 자극들과 가슴 아픈 자극, 또는 쓰라린 자극들이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의 작은 떨림과 불안한 눈망울만 쌀짝 흔들릴 뿐, 그녀는 언제나 무덤덤하다.     


실수로 허튼 감정 한 토막이라도 드러내면 통제할 자신이 없을 것만 같아서 감정을 마비시켜 버리고 살아간다. 행여 외로움이 찾아오면 집안 청소와 화초를 가꾸는 일에 몰두한다. 길에서 만난 혼자된 고양이에게 맛난 음식을 만들어주는 시간도 마비시켜버린 감정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여자, 정혜 안에 깊숙이 잠식하고 있는 슬픔과 외로움을 어찌할 수 없다. 흔들리고 있다. 아직 살아있는 여자, 정혜. 아프지만 트라우마가 그녀의 여성을 통째로 마비시킬 수는 없었던 것일까?    

 

여성을 잃은 것 같았던 정혜에게도 설레는 사랑이 찾아왔다. 우체국을 자주 드나드는 작가 지망생에게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하고 시장을 보고 밥상을 차려 놓고 마치 남편을 기다리듯이 낯선 남자를 기다리면서 영화는 정혜가 가둬 두었던 여성을 보여주며 그녀에게 아직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박제된 듯 살아가던 그녀의 내면에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향한, 공감과 친교를 절실하게 원하는 또 다른 자아가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한다. 죽은 듯 살아가는 사람도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 The Charming Girl     

여자, 정혜(The Charming Girl). 영문 제목의 단어 "charming"은 우리말로 '매력적이고 멋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뜻도 있는데, 반어적이고 비격식적으로 '누군가의 행동에 대한 불만'을 반대로 돌려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 매력적인 '여자, 정혜'는 두 가지의 언어로 세상을 살아간다. 고요한 늪 같은 여자, 정혜는 우체국 여직원으로 평범한 언어를 원하는 세상에 거꾸로 대답하는 '여성을 잃은' 사람이다.     


1. 우체국 여직원: 매력적인 여자이지만, 그녀의 일상은 정물처럼 단조롭고 지루함 그 자체이다. 박제되고 감정이 삭제된 한 영혼의 소유자, 매력적인 여자, 정혜. 그녀의 얼굴에는 밋밋한 그녀의 일상처럼 우울함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감정이 삭제되고 박제된 'The Charming Girl'이다.     


2. 역설적 언어와 충동적 언어의 소유자: 세상과 마주하는 그녀의 일상적인 언어(몸짓을 포함한)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반어적이었다가 또 때로는 불만이 가득한 아이처럼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녀가 마주하는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리에 정직하지 못해서일까?     


3. 용인할 수 없는 낯선 존재와 함께 사는 자아: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 그녀는 고양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직장에서나 동료들과 모인 술자리에서는 고양이를 걱정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어느 날에는 우체국을 자주 들르는 남자(작가 지망생)를 쫓아가서 대뜸 하는 말이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셔서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요?”이다. 그런가 하면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가 깽판을 부리는 이름 모를 한 남자를 여관으로 데려가 보듬어주기도 한다.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내면에 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때때로 낯설고 과장된 그녀의 몸짓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사건이 평범한 일상에 침투하게 되면 스스로 '낯선 존재'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평온하고 색깔 없는 자신의 얼굴이 스스로에게는 용인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얼굴로 맞서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낯선 존재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속으로 침투했을 때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은 아닐까?     


비상식적인 그녀의 언어들(몸짓)은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그녀를 문득문득 깨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로 그녀 자신조차 당혹스럽고 감당할 수 언어들로 말이다.     


4.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의 대립: 한 자아의 열정이나 고통과 같은 깊은 감정(파토스)을 특정한 시대나 집단을 지배하는 이념적 원칙이나 도덕적 규범(에토스)이 지배할 수는 없다. 파토스는 에토스보다 근원적이다.     


연민이나 동정, 슬픈 감정은 선험적이기에 그렇다. 근원어에 속하는 파토스는 사회적, 집단적 자아보다 앞서 있다. 원초적이고 개체적이다. 다시 말해서 시대나 집단, 이성이나 이념, 심지어 종교적 체험마저도 근원적 파토스를 지배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파토스는 인격체 자체를 통합하는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인이 마주하는 정혜와 그녀 자신이 상대하는  정혜는 다른 얼굴이고 다른 모습이다. Charming Girl, 정혜는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언어이다.     


사춘기 시절, 친척(고모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기억(트라우마)은 오직 그녀만의 것으로 남아있다. 그 어두운 사건,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도 일상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잔인하게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에토스와 파토스의 대립은 친근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아슬아슬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평온했다. 아무도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똑같이 앙갚음하지도 않았으며, 찢어 죽여도 결코 풀리지 않을 복수혈전은 없었다. 에토스와 파토스의 대립은 현실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한 무표정으로 살아있었다.     

5. 자포자기(自暴自棄)와 박제된 정서: 맹자는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고 했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편에서-     


무엇이 스스로를 해치고(自暴) 있고, 또 무엇이 스스로를 버리게(自棄) 하는가? 무엇이 우리와 나의 삶에 폭행을 가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아무것도 희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의 내일을 저버리게 하는 것일까?     


여자, 정혜는 살아있기 위해 일상을 평범하게 보내야 했다. 특별한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며, 일상에서 드라마틱한 일은 없어야 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침묵해야 했다.     


자신의 삶을 ‘정신병’이라는 이름 뒤로 감출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고, 인생을 환멸과 자기학대로 보낼 만큼 스스로에게 자비로울 수도 없었다. 그날 이후, 정혜는 한 여자로서 죽어야 했다. 정혜에게 여성성은 그날, 너무나 친근하고 낯익은 칼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찢기고 박제되었다. 너무도 친숙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짓밟힌 수많은 익명의 여성(性)들처럼, 작은 상처를 입은 듯 '메크 업 된 안정'을 별다르지 않게 살아내야 했다.     

소리 없이 무심히 흐르는 시간에게 여러 개의 자물쇠를 잠그고는 한 번, 두 번, 세 번 확인을 하며 살아내야 했다. 무기력하지만 말이다.     


#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말의 의미     

희망이 '매력'(charming)적인 이유는 그것이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을 때, 스스로를 더 '독려'(督勵) 하기 때문이 아닐까? 멈추고 싶어도 쉽게 멈출 수 없는 삶. 가슴 한편이 언제나 먹먹하고 답답한 인생.     

체증처럼 외로움과 절망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희망을 찾는 일이 때로는 용기보다 더한 행위를 필요로 할 때도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존재. 익명의 여자 정혜는 그나마 당돌하고 용감하다. 그래서 때로는 당혹스럽게 스스로의 성과 이름을 찾아 나서려 한다. 무기력과 무감각,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희망이라는 말은 아픈 이들에게 부정적인 느낌표로 다가올 때 더 매력적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녀는 구두 가게 점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발을 만지며 "언니. 언니. 언니한테 딱이네."라고 말하는 그에게 항의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든 원초적 가해자, 자기를 성폭행한 친척을 찾아가기도 한다.     


# 거꾸로 말하는 사람들     

상처 받은 이들에게 세상은 사무적으로 혹은 강단에 선 사람처럼 "얼른 치유하고 성장해!"라고 다그친다. 정작 고통스러운 상처를 직접 들여다보고 함께 공감할 용기는 없으면서 말이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힘과 용기가 없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한 자아에게 트라우마가 남기는 상흔은 때때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일상을 파고들어 자극하지만, 대부분 회피하고 침묵한다.     

"누구나 다들 상처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살다 보면 살아져요.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인내하면서 살아가세요."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 부르짖는 진실의 소리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중략)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ㅡ김승희, 객석에 앉은 여자     


# 박제剝製된 삶들에게     

박제剝製된 듯, 익숙한 일상에 갇혀 아파서 죽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처럼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밖의 얼굴’뿐만 아니라 ‘안의 얼굴’까지 들여다보고 살펴볼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일상이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그녀) 안의 자아’가 박제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외상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내상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한 자아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외상보다 더 심각한 게 내상이다. 트라우마는 또 다른 상처를 키우고 낳는다.     


사회적 무관심과 외면 속에 정혜와 같은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간다. 한 인격 ‘안에 갇힌 자아’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어떻게 살고 싶은 지, 아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 채, 트라우마에 구속된 영혼들의 수가 점점 늘어만 간다. 죽은 좀비들이 늘어만 간다. 살아있는 박제들이 늘어만 간다.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매력적이고 당돌한 부정적인 느낌표를 선물하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