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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Nov 01. 2020

레인 오버 미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2007년.

감독: 마이크 바인더

제작: 해피 매디슨

각본: 마이크 바인더     


#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영화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 찰리의 삶을 통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찰리는 9.11 테러로 아내와 딸 셋을 잃고 그 트라우마로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9.11 사건은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주인공 찰리 역시 그때, 아내와 세 딸,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한순간에 잃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찰리는 직업도 만나는 사람도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혼자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치과의사 앨런이 거리에서 찰리를 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찰리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친구와 함께 있어도 혼잣말을 하고, 헤드폰을 끼고 다니며 현실의 소리를 차단합니다. 어둡고 엉망진창인 그의 집은 찰리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친구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서도 찰리는 엘런이 묻는 말에는 동문서답하며 게임에만 몰두합니다. 찰리는 언뜻 보더라도 제정신이 아닙니다. 앨런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심리치료사를 통해 그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찰리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친구 엘런에게 과격한 행동을 보이며 화를 냅니다. 자신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지우려 했고, 기억을 다시 재조직화하려 합니다. 찰리의 이상심리는 복합적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그로 인한 ‘해리성 기억장애’, 그리고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입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과도한 각성 상태였습니다. 자신 안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말을 회피합니다.

    

“찰리,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어”(엘런)

“곧 문을 여는 가게가 있어. 주방 싱크대를 파는 곳인데 거기 가자. 대리석 싱크대도 있어.”(찰리)

“찰리!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까…”(엘런)     


현실인 듯 아닌 듯,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 찰리는 엘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도 딴청을 피우고 다른 말을 하며 ‘회피 둔감화 증세’를 보입니다. ‘해리성 기억장애’와도 관련이 깊은 ‘회피 둔감화 증상’은 압도적인 위협에 대해 완전히 무기력 해지거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해지는 증상입니다      


찰리는 현실을 피하고 싶고 듣고 싶지 않을 때, 게임을 하거나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크게 따라 부르는데요. 극단적인 회피 현상입니다. 듣기 싫고 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자극되면 난폭해지거나 폭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릅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 같습니다.     


“계속 이럴 수는 없어 찰리!”(엘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친구 엘런은 더 이상 찰리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뜻밖에도 찰리가 엘런에게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제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죠?”(상담사)     


드디어 상담이 시작되는데, 정작 찰리는 상담을 회피합니다.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꺼내 놓을 수 있도록 하는 치료사와 그에 맞서 강하게 거부하는 찰리.     


“얘기하기 싫어요. 기억 안 나요.”(찰리)

“하지만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해야만 해요.”(상담사)     


다행히 찰리는 낯선 치료사보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친구 엘런에게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 놓습니다. 몸과 영혼에 새겨진 고통과 절규의 트라우마를 말이지요.     


“모든 게 느껴졌어 … 그리고 불 속에서 타는 것이 느껴졌어…”(찰리)     

    

하지만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현실과 마주하는 일은 때로는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 역효과를 나타내며 위험한 상황을 동반하기도 하지요. 아내와 딸들을 잃은 절망과 상실을 마주한 찰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극도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압도당한 찰리는 마침내 자살시도를 하게 되고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치닫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사건으로 찰리는 정신감정을 받게 되고 장인과 장모는 이 기회에 사위를 치료해보겠다며, 사위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는 소송을 제기합니다. 환자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지요.     


잊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상처와 마주하는 것부터가 치료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환자에게 아주 위험한 상황 앞에 노출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요. 트라우마 환자들의 충격적인 외상 기억의 반복적인 재경험은 그들에게 잔상이나 악몽으로 현실에서 강렬한 정서적 고통을 유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치료가 아닌 영원히 고통이 없는 죽음의 문으로 환자를 내모는 위험한 상황을 이끌어내기도 하지요.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환자들의 본능적 반응이 오히려 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이끄는 방아쇠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그렇게 큰데. 왜 그들은 못 보는 걸까요? 가엽게도 그렇게 상처를 입었는데.”(상담사와 이야기하는 다른 여성)     


이렇게 공감하는 말에 힘을 얻은 것일까요? 찰리는 장인과 장모에게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을 말하며 자신을 변호합니다.     


“전 혼자서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 해요. 어디를 가든지요. 개도 보여요. 그래서 이지경이 된 거예요.”     

이제 엘런은 찰리를 치료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있어주고 함께 공감해줍니다. 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서적인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게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현실 부적응적 행동을 포용해주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 나를 지배하고 있는 존재      

지금!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내 삶의 자리에 군림(reign)하고 있는 존재를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reign over me’는 나를 지배하고, 내 삶에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충격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는 쉽지 않습니다. 당사자는 말할 수 없고,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혼돈과 혼란 그 차제이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과 상실감은 무기력과 도피, 혹은 여러 가지 중독 증세를 가져오기도 하고 남겨진 자의 슬픈 삶을 어둡게 물들이고도 충분합니다.      


“영국의 오스월드라는 경제학자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계량화해 사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생명의 가격치를 발표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서 받은 정신적 고통을 상쇄시키기 위해 1년 동안 얼마만큼의 금전적 보상이 필요한지를 조사 발표한 것이죠. 결과는 연간 22만 달러(약 251,600,000원)로 배우자의 사망이 가장 높았고, 자식의 사망이 그 절반 수준인 11만 8천 달러로 두 번째로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배우자와 자식을 동시에 잃을 경우 그 슬픔의 강도는 어떨까요? 트라우마 trauma: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상처의 크기로 계량화할 수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트라우마는 없을 것입니다.”     


“Leave me alone!”     


한 순간에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는 찰리의 전부를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를 단절하게 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약물 중독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인데요. 처음에는 잃어버린 가족을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피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세상과의 소통과 연결을 전면 거부합니다. 스스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인데요. 트라우마의 지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환자는 시간이 멈춘 자기만의 울타리 속에 자기를 감금한 채, 우울한 나날들을 혼자 보내지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데요. 잘못된 선택은 결국 트라우마의 지배 아래 놓인 환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선사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트라우마의 군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자동차 운전자가 어떤 예기치 못한 충격으로 브레이크와 액셀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처럼. 한 자아의 정서가 지지선과 한계선을 잃었을 때, 감성은 이성이라는 운전대를 잃고 혼란과 공허의 지배를 받게 되지요. 방향감을 잃은 마음은 액셀과 브레이크를 구별하지 못하고, 안정을 잃은 정신은 코마 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사고를 일으키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치유의 시작     


“미안해, 찰리. 다 내 탓인 것 같아. 내가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지? 난 다만 네가 낫기를 바랐을 뿐인데 ……”     


- 치유의 시작은 이해와 공감: 준비 단계가 생략된 상태에서 트라우마를 직면해야 했던 찰리는 극도의 고통과 절망에 압도당하게 되는데요. 자신에게 일어난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고 고통이며 상실감인지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이죠. 결국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상실감에 괴로워하던 찰리는 예상대로 극단적인 자살 행동을 하게 되는 데요. 자해와 자살 시도는 트라우마 환자를 치유하는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 치유의 시작은 ‘있는 그대로’ 그들의 행동을 바라봐 주고, 이해해 주며,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것부터.      


- 안정감과 연결감: 트라우마 환자들은 자신의 정서적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부적응적인 행동까지 이해해주며 포용해 줄 수 있을 때, 안정감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엄마 품에서 아기가 안정감과 연결감을 느끼듯이 말이지요. 정서적인 치유는 정서적인 공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환자를 이해하려고 할 때, 모두가 트라우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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