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많은 관심을 기울이신 공동체이지요. 크고 작은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신 곳입니다. 그만큼 마음과 사랑을 아끼지 않은 마을들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종교 교육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당신께서 직접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백인대장의 종과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으며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특히 갈릴래아 지방을대표했던 이 세 도시는 동북으로 연결된 큰 도로 덕분에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고, 갈릴래아 호수와 맞닿아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물질적 풍요는 내면의 빈곤을 낳게 되는데요. 오늘날 미국이 빈부의 격차가 가장 큰 나라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라고 하신 이유를 오늘 다시 깨닫게 되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피조물도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데, 오히려 유다인들의 신앙은 탐욕과 욕망에 가리어지고 선민의식에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가시덤불과 돌밭 같은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축복과 보살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탕자였다가 회개한 작은 아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있는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하십니다.(마태 11,22-24.)
# 다 같이 함께 사는 영성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개인이 아닌 도시 전체를 두고 꾸짖으시는데요. 공동체 영성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주제들로 공동체 영성이 개인의 영성만큼 강조되는 이유는 '다 같이 함께 살아가기'가 그만큼 힘든 이유이겠지요.
또 사람이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또 일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공동체(가족)에서는 개인의 영성보다 공동체 영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 영성의 힘은 한 개인의 영성을 더욱 깊게 뿌리내리게 하고 더욱 굳건하게 하며, 공동체와 개인에게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공동체의 삶보다 개인의 삶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에는 이 영성이 터부시 되고 시들어간다는 점입니다.
# 두 바퀴 원리
공동체 영성에 대해서 교부들은 많은 가르침을 남겼는데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바로 '신뢰'와 '사랑'이라는 말씀인데요.
공동체가 유지되고 공동체다워지며, 성장하게 되는 두 개의 수레바퀴. 단연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 두 개의 바퀴는 하나의 축과 연결되어(반석, 원사랑, 아가페 사랑) 멀고 긴 여정을 무탈하게 운행할 수 있게 합니다.
신뢰와 사랑이 두 개의 바퀴에 비유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신로와 사랑, 사랑과 신뢰. 이 두 바퀴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 같은 지점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공동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마주 보며, 같은 걸음을 걷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처이며 힘이고 용기라는 강한 확신, 즉 신뢰가 필연적 요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가페 사랑은 각 구성원들 사이에서 싹튼 신뢰를 더욱 다져주고 더욱 성장시켜주며 서로 부드럽게 결속시켜 주는 윤활유이지요.
마지막으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두 바퀴가 제대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두 바퀴를 연결해주는 연결축, 혹은 지지축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인데요. 그 연결축이며 지지축은 그리스도입니다. 신뢰와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