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헤어숍의 창을 두드리는 건 빗물뿐이었다. 그녀도 비가 되어 찾아왔다. 회색빛 얼굴, 초점을 잃은 시선, 앙다문 입물, 그녀의 하늘은 폭우를 쏟아내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린 빗물의 무게는 고스란히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있었다.
"모처럼만에 찾은 행복을 누군가 빼앗아 가버렸어요..."
말없이 물 잔을 내민 내 손등 위로 그녀는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티슈를 건네자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두 창에서 흐른 비는 점점 거세졌다. 기어이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에게서 길 잃은 늑대의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작심하고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에 같이 주져 앉아 비가 되어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행복했거든요. 오늘부터는 더 이상 수변공원 화장실을 이용할 일도 차 안에서 잘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그 애가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 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어요... 즐겁고 행복한 드라이브였어요.
이제부터는 눈치 보지 말자 아가야. 사람들이 놓은 덫에 걸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받지 말자 아가야. 무너져 가는 시골집이지만 엄마가 쓸고 닦으면 새 집처럼 바뀔 거야. 그 세상에서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 아이가 내게 물었어요. '엄마 그곳에는 정말 덫이 없나요? 상처를 파먹는 하얀 벌레도 없겠죠?'
나는 라디오의 음악 소리를 높이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어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란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곳에는 새들도 많고 개구리도 많단다. 새들이 얼마나 많으면 마을 이름이 '다조 마을'이라 하데. 그때 라디오에서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고 있었지요.
이 음악을 청한 사람도 어제까지의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인가 보구나 생각했죠. 그 사람도 나와 쇼팽처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지만 불확실한 삶과 잃어버린 건강, 비판적인 이웃들의 시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가 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이처럼 슬픈 비가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쇼팽의 두려움과 슬픔이 피아노 건반을 따라 더 깊어지고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점점 거세지자 아이가 불안해하며 물었어요. '엄마 하늘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어요.'
뚝 뚝 뚝 뚝... 죽음의 발걸음처럼 규칙적이고 분명한 소리도 없지요. 뚝 뚝 뚝 뚝...아이가 자꾸만 내 품으로 파고 들 때는 저도 정말 무서웠어요. 혹시 우리에게 닥칠 불행한 길을 빗물이 막아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 돌아섰어야 했는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얀 껍질에 검은 상처를 가진 사시나무처럼 그녀는 절망에 떨고 있었다. 길 잃은 영혼이 내 품에서 흐느끼며 떨고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프레데리크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 그날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쇼핑을 하기 위해 아들 모라스와 함께 외출을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더니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갑자기 불어난 급류로 길도 막혔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돌아서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집에 도착했다. 집 지붕에서는 장대 같은 비가 기왓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피아노에 앉아서 빗방울 소리를 피아노로 치고 있었다. 그는 눈물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비에 당신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소.' 빗방울은 그의 가슴속에서 눈물로 변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밤은 이미 깊었고 폭우는 점점 거세졌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랑. 쇼팽은 절망했다.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떠났구나.
폐결핵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깊어 있었고 타국에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인데, 이제 그녀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슬픔과 두려움이 결핵으로 숨 쉬기조차 힘든 그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외딴 수도원. 천국 같던 그곳이 그녀의 죽음 앞에 선 쇼팽에게는 더 이상 천국일 수 없었다. 지옥이었다.
쇼팽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병든 몸을 연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다만, 이 절망스러운 고통을 피아노가 함께 아파해주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함께 울어주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이 짧은 순간을 함께 고통스러워해 주기를. 그래서 이 절망스러운 현실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질 수 있기를.
마침내 절망에 사로잡힌 쇼뱅의 손가락은 수도원 첨탑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더듬어 갔다. 외롭고 고독한 빗방울, 두렵고 무서운 빗방울. 폐결핵과 함께 찾아온 죽음의 빗방울. 사랑과 고독, 미련과 아쉬움, 그리움과 연민으로 떨고 있는 쇼팽의 손가락은 그렇게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 상드가 죽었다고 생각한 쇼팽의 영혼은 이미 그녀와 함께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의 음악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 사이 상드 역시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 가는 길 위에서 생사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폭우 속에서 수렁에 빠졌고 마부는 달아났다. 하지만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쇼팽을 생각하면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쇼팽을 향한 상드의 사랑은 그녀에게 장장 12킬로가 넘는 빗길을 6시간 동안 걷게 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빗속에서 그녀의 맨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드가 발데모사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상드를 본 쇼팽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
"사랑하는 아가야.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무너져가는 집에 신경 쓰느라 너를 돌보지 못했다. 너와 놀아주지 못했고 단 일분도 네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구나... 사랑하는 아가야... 엄마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뚝 뚝 뚝 뚝... 뚝 뚝 뚝 뚝...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타고 빗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집은 우리를 받아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집이 우리를 품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제야 아이의 이름을 불렀어요. 너무 늦게 말이죠. 너무 늦게... 아이가 곁에 없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늦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 알아챘을 때. 설마 하는 두려운 예감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현실이 되었어요.
도대체 왜! 나는.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일곱 시간 동안이나 아이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을까요? 왜? 무엇이 그렇게 소중했기에... 무엇에 사로잡혔길래... 나는. 나는.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까요? 왜? 왜? 왜?
“사랑하는 조르주,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당신 맞지? 난 당신이 급류에 휘말리는 환영을 봤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내 가슴에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