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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에서
77번 바닷길
by
진동길
Nov 6. 2022
77번 바닷길
지친 해거름 따라 걸었지
그물을 손질하던 한 늙은 어부가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 빠진 잇몸으로 불러 세워 말했어
어이 젊은 양반
옷깃 한 번 스치는 데 500겁,
부부의 연은 7000겁,
부모 자식의 연은 8000겁.
인연은 시간이 쌓여야 한다는데
우리의 인연이 범상치 않으니
저기 보이는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 잔만 시켜주게
배가 고파서 그러우.
편의점 여주인은
창백한 얼굴로 낡은 종이 책을 읽고 있었어
종이 책이 반가워 힐긋 넘어봤지
사방 십 리나 되는 바위산을
백 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비단 치마로 스쳐
그 산이 다 닳아 없어져야 하는 시간
한 세상이 창조되었다가 사라지는
그 짧은 찰나에 여주인이 말하기를
갓 볶은 1983년 산 아라비카 원두뿐입니다.
우유는 한 방울만, 전쟁과 질병을 일으키는
설탕은 없습니다.
77번 바닷길
500겁이나 지나
지친 해가 다시 기운다
어이 젊은 양반
다시 생각해봐
옷깃 한 번 스치는 데
500겁이라네, 500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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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시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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