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에서

77번 바닷길

by 진동길
파라다이스.png



77번 바닷길

지친 해거름 따라 걸었지


그물을 손질하던 한 늙은 어부가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 빠진 잇몸으로 불러 세워 말했어


어이 젊은 양반

옷깃 한 번 스치는 데 500겁,

부부의 연은 7000겁,

부모 자식의 연은 8000겁.


인연은 시간이 쌓여야 한다는데

우리의 인연이 범상치 않으니

저기 보이는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 잔만 시켜주게

배가 고파서 그러우.


편의점 여주인은

창백한 얼굴로 낡은 종이 책을 읽고 있었어

종이 책이 반가워 힐긋 넘어봤지


사방 십 리나 되는 바위산을

백 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비단 치마로 스쳐

그 산이 다 닳아 없어져야 하는 시간

한 세상이 창조되었다가 사라지는


그 짧은 찰나에 여주인이 말하기를

갓 볶은 1983년 산 아라비카 원두뿐입니다.

우유는 한 방울만, 전쟁과 질병을 일으키는

설탕은 없습니다.


77번 바닷길

500겁이나 지나

지친 해가 다시 기운다


어이 젊은 양반

다시 생각해봐

옷깃 한 번 스치는 데

500겁이라네, 500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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