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미' 봄이 왔고 절기가 바뀌었어도 봄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불평, 원망, 한탄, 좌절과 절망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사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교회의 전례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이하여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1 베드 1장)
하지만 오늘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걸고 따랐던 스승 예수가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허무하고 맥없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차마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온갖 불평, 원망, 한탄, 좌절, 절망과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랬듯)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 20, 19b)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고 스승이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말할 때, ‘일어서다’, ‘오르다’, ‘깨우다’의 의미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와 그 명사형인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 그리고 ‘에게이로’(έγείρω)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 말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마태 8,15; 22,24; 26,62; 27,53; 마르 14,57,60; 루카 4,14; 22,45; 사도행전 7,18 등) 부활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도박입니다. 죽고 나서 부활한다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데,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산다는 것은 뭔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도보다 못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표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 “진실의 본질은 불편함”이라는 생각도 쉽게 떨칠 수 없고, 또 한편 그의 말에 공감이 가는 경험들도 많습니다. 사실 부활의 삶은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을 선택한 신앙인은 남겨진 생애를 하느님과 이웃 앞에 온전히 내어놓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만의 삶과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본능에 충실한 삶) 이별하고 공동체적인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죽지 않은) 지금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 복음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죽으나 사나 지금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그분의 권능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빛으로 삼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와 그분의 통치가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지기를. 또 그렇게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하느님과 맺은 약속은 불가역적이고 영원한 약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신앙인들은 부활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정녕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첫 번째 죽음(죽음 이전의 죽음을) 껴안았고, (살아서 죽음으로) 부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거룩함과 완전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죽지 않고 부활한 삶으로의 초대는 필연적으로 거룩함과 완전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레위기 19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 48)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젊은이에게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장)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부활한 삶(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부활논쟁 이후,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답을 스스로 얻게 하는 장면에서 부활 후, 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어야 할까요?
어디를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한 가지 숨겨진 큰 콤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없다는 것.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늘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요. 하지만 마음은 늘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남자도 그녀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눈썹 때문에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그녀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기만 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그녀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지만,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은 온통 검정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나고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자기만의 비밀을 들켜버릴 것 같아서, 거울 없이는 함부로 얼굴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떨고 있는 자기 마음의 진동처럼.
수십수백 컷의 사진이 영사기 너머로 소리 없이 돌아가듯, 그녀는 그 둘 사이에 숨 막히는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남편의 손길은 그녀의 눈썹만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그런 남편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숨겨주고 싶은 아내의 비밀을 남편은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그녀의 눈물까지 다 닦아준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연인은 시력이 나쁜 연인이라고 합니다. 흐릿해서 더 아름답고 잘 안 보여서 흥미를 잃지 않을 정도의 시력, 사랑하는 사람의 시력은 그래야 하지요. 죽지 않고 부활한 이들. 육신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삶은 시력이 나빠야 합니다.
늦장가를 간 한 남자가 결혼을 하고 아내가 어여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모두들 아내가 어디가 그렇게 예쁘냐고 묻습니다. 남자가 대답합니다.
“눈이 나빠서 세상이 좀 흐릿하게 보이는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던 때보다 훨씬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내도 그렇습니다.”
최고의 연인은 시력이 나쁜 연인입니다. 뾰루지 같은 건 알아보지도 못하고, 귤껍질 같은 피부도 도자기 피부로 봐주는 눈 나쁜 연인. 작은 실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큰 실수도 잘못 봤으려니 넘기고, 허술한 마음 같은 건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눈 나쁜 연인. 잘 안 보이는 것들은 모두 다 좋은 것이려니 여기는 시력 나쁜 연인, 그런 사람이 최고의 연인이다. -참조: 김미라,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중에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 4-6)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 33)
우리에게도 최고의 연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눈도 안 좋으시고 기억력도 나쁘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만은 따뜻한, 사랑에 빠진 바보 같은 연인. 눈물도 많고 마음은 여리며,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그런 연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에 돋아난 뾰루지 같은 건 본체만체, 알아도 모른 척, 그 많은 투정과 불평도 참아 받아내시는 분이십니다. 내 안에 수없이 많은 탐욕과 욕망의 죄들과 위선과 거짓의 허물들을 당신 혼자 뒤집어쓰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조차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며 기도하시는 정말 바보같이 눈 나쁜 연인. 주님이십니다.(루카 23, 34)
그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곧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마르 13, 32). 그러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겠지요.
부활의 삶. 모두가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작은 실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큰 실수도 잘못 봤으려니 넘기고, 허술한 마음 같은 건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눈 나쁜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밖에 모르고 이웃을 사랑할 줄밖에 모르는 눈 나쁜 연인. 서로가 서로에게 “잘 안 보이는 것들은 모두 다 좋은 것이려니 여기는 시력 나쁜” 그런 최고의 연인으로 살아갑시다. 우리 모두 죽음 이후, 맞이할 부활을 위해 사랑의 등불을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