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 어디로 무엇을 찾아서
# 어디로? 무엇을 찾아가는 길인가?
사람의 삶을 크게 들여다보고 있자면 ‘어디로? 무엇을? 찾아가는 길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소망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스러져 흩어져버릴 때에는 ‘지금껏 걸어왔던 이 길이 올바른 길이었던가?’라는 자문에 때로는 후회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며 따르던 스승이 어느 날 죄수로 몰리더니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지만 끝내 십자가 형을 당해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 더더욱 그 시신까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 스승의 신원과 그분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인생을 걸었던 일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인지. 막막함에 방황하게 됩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는 편이 지혜로운 선택 같아 보입니다.
2007년 1월 12일 아침. 정신없이 분주한 출근길, 더군다나 장소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혼잡한 랑팡 지하철역. 청바지에 허름한 티셔츠 그리고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낸 후, 그 케이스에 1달러 지폐와 동전 몇 개를 놓고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연주는 45분 동안 이루어졌고, 총 6곡을 연주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 남자가 연주하는 앞을 지난 사람은 수천 명, 아니 그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27명만이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은 사람이었고, 1분 이상 멈춰서 연주를 들은 사람은 단 7명, 그중 한 명은 3살짜리 꼬마였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연주를 열심히 듣고 감동받은 한 명은 랑팡 지하철역 구두닦이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런 제목을 단 신문 기사가 실리지요.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하철 역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사람은 바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그는 2000년 머큐리 음악상을 시작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영화 음악상,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기악 독주자, 또 에버리 피셔상 등등 수없이 많은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음악 천재였습니다.
그가 지하철역에서 들고 연주한 바이올린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13년 제작한 350만 달러, 한화 추정 48억 원짜리였습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는 그의 평소 개런티는 1분에 1000달러. 그의 공연을 보려면 수개월에서 1년 전부터 예약을 하고, 수천 달러의 티켓 값을 지불해야 ‘조슈아 벨’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대를 벗어나 무려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길 위에 나섰지만, 그날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에는 37달러 17센트가 들어있었습니다.
이 실험은 ‘워싱턴포스트’지가 기획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술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접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실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을 알아보지 못했다.” -참조: 최영옥 음악평론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실 들을 귀도 없고, 볼 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음악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특히 사람을 보는 눈은 어찌도 그리 자기 마음대로인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지능도 우월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선 제자들과 우리들의 삶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눈은 뜨고 귀는 열려 있지만, 진리와 진실은 외면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우리의 처지는 엠마오로 가는 여정 중에 있는 두 제자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삶의 위기이자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때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세상 어디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그분은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온 세상에서 우리와 또 나와 함께 슬퍼하시고 내 멍에를 함께 짊어지십니다. 예언의 성취이자 메시아의 승리입니다. 상처받은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내 역사에 귀 기울여 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힘도 주십니다.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분은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실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시지요. 왜냐면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셨고 다시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