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위에서 오신 분

by 진동길


위비건 호수 효과


게리슨 케일러가 지어낸 가상의 마을 '워비곤 호수'에는 모두 평균 이상의 사람들이 살지요.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아이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습니다.“

"착한 우리 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 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저는 잘 못 한 게 없어요. 모두 세상 탓이에요."


‘위비건 호수 효과(The Lake Wobegon Effect)’. 또는 ‘우월성 환상’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일반적인 오류’를 말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지요.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창조적이고 매력적이며, 성실하고 공정하다고 믿는 오류. 자신이 남들보다 평균 이상이며, 모든 면에서 타인보다 앞선다고 믿는 과신.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는 쉽게 망각하게 한다고 하지요. 우월성 환상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자백하는 명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귀한 신원을 되돌려준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위’에서 오신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의 ‘신원’을 당신과 함께 높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삼으셨으며, 아버지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내어주기까지 그를 믿는 이들을 높여 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 12,10)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습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 코린 15,50)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높여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은총 충만한 ‘생명’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은사를 온통 세속적인 것, 썩어 없어질 ‘육’적인 것에 쏟는 사람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삶과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평범한 철봉 하나는 5달러입니다. 하지만 이 철봉으로 말발굽, 편자를 만들면, 그 가치가 50달러입니다. 10배가 뜁니다. 이 철봉으로 바늘을 만들면 그 가치는 5천 달러입니다. 가치가 천 배 뜁니다.


그런데 이 철봉으로 정교한 스위스 시계의 용수철을 만들면 그 가치는 50만 달러가 됩니다. 가치가 십만 배가 뜁니다. -참조: 소천, ‘이리 찬란해도 되는 겁니까?’ 중에서-


철이 그냥 철봉을 만드는 사람의 손에 가면 5불의 가치가 되고, 바늘을 만드는 사람의 손에 가면 5천 달러의 가치가 되지만, 용수철을 만드는 사람의 손에 가면 50만 달러가 됩니다.


똑같은 질료(물질)도 ‘누구의 손에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가’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거듭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그 외아들의 손길을 믿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 3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를 가치 있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삶으로 거듭나셨기를. 영원한 생명의 주인을 믿고 증언한 삶으로 부활하셨기를. 신앙인은 하느님의 손에서 거듭날 때,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기에.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 13)




그분은 누구인가?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때,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에 집중해 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믿지 못하고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간절함이 담긴 마음으로 말씀하셨을 테지요.)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이어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 번씩이나 강조하시면서 말이지요.


1.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2.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나는 심판하지 않는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47절)


3.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49절)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신성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판타지 소설과 과장된 SF영화를 너무 자주 본 탓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그 힘은 인간(타인) 보다 나약했습니다. 슈퍼맨처럼 강하거나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마법을 쓰거나 강력한 화력을 지닌 무기로 인간을 위협하지 않으셨지요.


그리스도의 신성. 그 존재방식은 빛으로 오셨지만 결코 빛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그 삶의 방식은 율법 위에 계셨지만 지배하려 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비를 베푸셨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그 관계 맺음은 스승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교만하시거나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가난한 이)에게는 겸손하셨고 아버지께는 순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신성. 그 자기 초월과 부활은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셨지만, 유령이나 신령스럽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극히 인간적이셨고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그 언어는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셨던 그분은 한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지만, 화려하거나 유창하거나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복음을 선포하실 때, 그 말씀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온전한 인성에서 빛났습니다. 그 지극한 사랑은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드러납니다.



흠이 없으신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를 향한 성자의 마음은 측은지심의 사랑으로 불타오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이 말에 상응하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라하밈'(רחמים)입니다. 우리말로 '자궁'을 의미하는 ‘라함’(רַחַם)에 뿌리를 둔 말인데요. 자녀를 향한 지극한 모성을 표현하지요.


측은지심으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먹이십니다: 오천 (마르 6,30-44; 마태 14,13-21), 사천 (마르 8,1-10; 마태 15,32-39).

2. 더러운 영을 내쫓아 주십니다: (마르 9,14-29)

3.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루카 7,11-17)

4.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십니다: (마르 1,40-45)

5. 예리코의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마태 20,29-34)

6. 그 마음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마태 18,23-34);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루카 15,11-24a);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10,25-37)




당신도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살아 계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나도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내 살을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입니다."(요한 6,57)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신 우리도 그분의 신성을 입었습니다. 그분의 신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분처럼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그렇게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타고난 힘과 특별한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닌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그래서 힘겨운 인생길에서 누군가에게 구원자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도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탁월한 언변과 지식으로 형제와 이웃을 심판하거나 매도하지 않고 용기와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면, 아름다운 노래로 다정한 말로 기쁨을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면. 당신도 그리스도와 하나이며, 당신은 이미 구원자이자 빛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흠 없는 하느님의 어린양 “외아드님이 (우리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요한 1,18)

아버지와 같으신 분.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는 그분의 애끓는 마음에는 권위나 책망이 없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원천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랑은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고 사랑의 원인이자 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지금 비록 우리의 영혼이 거처하는 집이 비루하고 누추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시 깨끗해지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은 이곳 혹은 저곳이나 이때 혹은 저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은 공간적이거나 시간적 차원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이며, 영원은 '지금-바로-여기'입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부활하는 우리. 그날 사랑하려거든 지금-바로-여기서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흠 없는 사랑으로 병자와 죄인을 깨끗이 해주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서로-지금-여기'서부터 쪼개지고 나누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각해 볼 이야기


1. 나는 누구인가?

2. 인간의 가치와 나의 꿈

3. 타인을 위한 삶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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