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빠와 삼위일체
인간의 본성
먼 길을 여행 중이던 할아버지 수사와 꼬마 수사가 개울을 건너려 할 때였습니다. 꼬마 수사가 뜬금없이 인간의 본성은 선한지 악한지 물었습니다.
그때마침 독을 잔뜩 품고 있는 전갈이 개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지요. 헤엄칠 능력이 없는 전갈이기에 그냥 두면 죽는 것이 뻔했습니다. 이를 알고 있는 할아버지 수사는 전갈을 집어서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전갈은 할아버지 수사의 손을 꼬리 끝 독침으로 쏘았습니다. 할아버지 수사는 깜짝 놀라서 손을 흔들었고 전갈은 다시 개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수사는 다시 전갈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갈은 수사의 손을 또 독침으로 쏘았지요. 수사는 이번에도 역시 손을 흔들 수밖에 없었고, 전갈은 또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수사는 다시 전갈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전갈은 이번에도 수사의 손에 독침을 찔러 넣었습니다. 수사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수사는 이번에는 꾹 참고 전갈을 안전한 풀숲에 내려놓았습니다.
전갈이 고마워했을까요? 전갈은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없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 사라졌습니다.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꼬마 수사가 물었습니다.
“전갈이 수사님을 계속 찌를 게 뻔한데 왜 끝까지 구한 거죠?”
그러자 할아버지 수사가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허허허. 네가 내게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묻지 않았니?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직접 보여준 것이란다. 전갈은 찌르는 것이 본성이고,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본성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란다. 조금 전 네가 본 것은 전갈이나 나, 모두가 본성에 충실했던 순간을 본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창세 1,26-27)
하늘(Heaven)에 계신 아빠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
하늘. 그 어원은 한(큰)이라는 말과 울(울타리)이라는 두 낱말이 하나가 되어 한울(하늘)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말이 되었습니다.
하늘은 물리적 시각에서는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피조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리이자 숭배와 신앙의 대상들이 머무는 영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하늘은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여겨져 왔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꼿꼿이 쳐드는 일은 불경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처지를 스스로 돌아볼 때,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을 하늘에서 찾았음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하늘 아래의 존재. 특히 자기 인식이 가능한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은 그야말로 미약하고 나약하며 비천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시편 작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노래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우주를 창조하시고 해와 달의 질서를 지우셨으며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의 아빠, 아버지를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왼쪽이 성부이고 가운데가 성자, 오른쪽이 성령이다. 그런데 세 분의 옷에서 푸른색이 공통적으로 눈에 띈다. 이 푸른색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색으로 세 분 모두 하나의 하느님으로서 천주성을 나타내며 각기 들고 있는 지팡이도 역시 한 분이시며 같은 권한을 가진 하느님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옷에서 보면 붉은색을 공통적으로 또한 볼 수 있다. 이는 고대로부터 황제를 나타내는 황제의 색깔로서 왕권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은 녹색 겉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생명과 희망을 나타내주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령강림대축일에 붉은색 제의를 입는데 러시아에서는 성당에 푸른 가지로 장식하고 녹색 제의를 입는 것이 특징이다.
성부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고향으로서 성부 위에는 집을 묘사했고, 성자의 뒤에는 아브라함의 집 앞에 서있던 상수리나무를 묘사했으며 장차 주님이 달리실 십자가의 나무를 예표하고 있다. 성령 뒤에는 바위가 늘 묘사되는데 이 바위는 성령은 우리 신앙의 굳건한 토대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무릎 선을 연결해 보면 하나의 커다란 잔의 형상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동방교회의 이콘에 보면 잔의 형상 속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성자께서 구원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셨음을 나타내 준다. 그림의 식탁 위에는 잔의 모양의 그릇 속에 구약의 희생 제사의 제물인 황소의 머리가 놓여 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강복하고 계시고, 성자는 천주 제2 위이심을 손으로 형상화하고 계시며, 성령께서는 식탁 아래에 열려 있는 공간 즉 세상을 향해 강복하고 계신다. (평화방송 – 함께 보는 교회미술)
삼위일체와 양태론(modalism)의 오류
사랑이신 하느님을 소개할 때 삼위일체라는 어려운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의 의미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성부와 구원자이신 아들 성자와 그리고 이 두 분의 관계를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세 위격이시다. 그러나 세 위격은 서로 동등한 한 본성으로 같은 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Trinitas)이신 하느님을 설명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가 양태론(樣態論)인데요.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을 취하시어, 때에 따라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논리이지요.
문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존재하게 되는 데요. 이렇게 되면 가면을 쓴 신과 다르지 않지요. 양태론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존재성을 지나치게 과장 변화한 데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양태론(modalism)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한 인격의 하느님이 하늘에 계실 때는 성부로 계셨고, 이 땅에 구속주로 오셨을 때는 성자로 계셨고, 지금 성령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성령으로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성부의 수난설을 주장하지요.
더 쉬운 예를 들면 한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신자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된다는 주장인데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명백한 오류이지요. 각각의 서로 다른 세 위격을 한 위격으로 단일화하거나 동일화하는 오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신 분”이십니다.(전례서 감사송)
신의 역설: 현존재이시며 초월자
신학이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삼위일체라고 하는 이유는 위격은 각각 다른 분이시지만, 한 본성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초월해 계시는 현실태(탈출 13장)이시고 현존재이시며,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셨지만, 초월자로서 삼위는 항상 한 본체이셨습니다.
삼위의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와 아들과 그분의 영으로 항상 현재이시며, 처음과 같이 지금처럼 영원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현실태는 ‘황홀함’이자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사 6장). ‘아가페 사랑’으로 체험되지만 초월적 존재(요한 1장)입니다. 신의 역설입니다.
삼위일체의 관계
비밀스러운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아들과 함께 자기 계시자이신 하느님의 ‘내재적 관계’(본성)는 아가페 사랑에서 현현되지요.
삼위일체의 관계는 서로의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상호-침투(浸透), 상호-훈습(熏習,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περιχώρησις) 하시는 관계. 기쁨과 슬픔, 고통과 절망을 서로 나누며,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한 마음으로 마치 무대에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사람들에 비유됩니다.
하느님은 서로 사랑하며,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로 스며들며, 서로가 서로에게로 다가가고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셋이지만 ‘나’-‘너’-‘우리’가 하나인 존재.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1+1+1=3이 아니라 1+1+1=1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사랑의 관계: 신비체험
인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각각 서로 다른 ‘사랑의 신비’로 체험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는 신앙의 신비이지요.
하지만 사랑의 신비는 하느님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았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내리사랑의 '계시사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난 그 사랑은 마침내 우리를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안으로 초대하셨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으로 현실이지만 그분의 현재성은 역설이며, 그 사랑은 신비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14,9).
삼위일체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로운 사랑’이고 피조물에 대한, 특히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황홀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신비,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체험 말이지요.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버지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사랑, 아가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현된 아버지의 사랑. 그것은 신비였습니다.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밝히 드러낸 사랑. 그것은 역설적 신비였습니다.
그 신비로운 사랑이 여전히 성령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전례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신비롭게 열어 보이십니다. 나보다 더 나와 가까이에서 나를 마주하시는 사랑. 그 사랑은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도들에게 전해졌고('원체험'), 이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각자의 일상에서 '거듭 체험'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신비'로 말이지요.
참사랑은 자신 안에만 머무를 수 없기에. 자녀들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너'에게로 가서 '나'를 내어 줌으로써 관계를 맺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 요한 4,16)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신비'로 말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 요한 4,8-9.12.)
삼위일체. 그 신비한 사랑의 공동체는 완벽한 상호 내어줌. 완벽한 상호 증여로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볼 이야기
1. 사랑의 의미
2. 사랑의 공동체란
3. 내어줌과 소유욕에 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