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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07. 202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동행하는 사랑

'엠마오 가는 길', 로베르트 췬트. (1877)


동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선이 결핍된 사람들'(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을 봅니다. 유혹자에 의해 일그러진 하느님의 모상이지요. 그 내면에 뿌리내리고 있는 아담의 두려움(δεῖμα데이마: 두려움, 공포, 무서움)과 카인의 폭력(λαβροσύνη라브로쉬네: 폭력, 탐욕, 욕심)은 전염성이 매우 강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의 행복이나 생명까지 위협하지요.(창세 3,10; 4,5) 그들의 마음에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쇠약(ἀκράτεια아크라떼이아: 결핍, 부족, 쇠약)해졌음도 느껴집니다. 불확실한 미래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거짓된 허상'이나 '거짓된 우상'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을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가시는(마태 18,11)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일그러진 하느님의 모상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복원될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귀한 그 품위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참조: 가톨릭 교리서 1701)




한 선교사가 숲이 울창한 밀림지역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길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목은 말라 갈증이 났습니다. 하늘은 먹장구름을 가득 품고 금세라도 폭우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는 생각했습니다. '곧 날이 어두워지면 사나운 맹수들의 공격도 피할 수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불확실한 걱정과 불안, 공포,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을 향하여 좇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한 원주민이 아들과 함께 땔감과 식량을 찾아 밀림 속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반가운 나머지 뛰어가서 원주민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지금 길을 잃었습니다. 내가 마을로 갈 수 있는 길을 좀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선교사를 본 원주민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한 뒤 아들과 함께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한동안 원주민을 지켜보던 선교사의 마음은 답답해졌습니다.


"여보시오. 날이 곧 저물 텐데.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면 혼자서 마을을 찾아가 보리다. 길만 가르쳐주시오.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조급해하던 선교사가 원주민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선교사를 한 번 힐끗 보더니 "곧 끝납니다. 기다리세요."라는 말만 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길만 가르쳐주면 혼자서도 잘 찾아갈 수 있는데 굳이…' 선교사는 불만이 가득한 혼잣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지나자 비구름이 머리꼭지에 이르렀고 멀리서 천둥번개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습니다. 다급해진 선교사는 다시 원주민을 재촉했습니다. "이보시오. 해가 곧 떨어지겠오. 하늘을 보시오. 금세라도 비가 올 듯하오."


그제야 원주민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는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말하며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떨어진 밀림 속에서 선교사에게 믿을 사람은 오직 원주민뿐이었습니다. 주위는 온통 어두움에 잠겨 길이라고 짐작할 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원주민을 놓칠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바싹 달라붙어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길 같은 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망설이던 끝에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앞서가는 원주민에게 퉁명스레 물었습니다.


원주민과 그 아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선교사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바보 아냐?”라고 말하는 듯했지요. 이어서 원주민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선교사에게 드러내며 “이곳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발을 내딛는 곳이 곧 길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쉬지 않고 앞서가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선교사는 원주민을 따라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선교사는 낮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와 숲이 울창한 밀림에서는 길이 없는 게 당연했습니다. '길 없는 길'에서 유일한 길은 원주민이었습니다. 그는 밀림 속에서 밀림과 함께 태어난 사람이고 밀림과 함께 성장했으며 매일같이 가족을 위해 밀림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아다녔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그가 선교 사에게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줄 수 있는 안내자이자 나침반이었으며 지도나 다름없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나그네 길과 신앙의 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 만일 그 길을 혼자 간다면 인생도 밀림과 같이 길 없는 길과 다르지 않겠지요. 주위를 둘러보면 수많은 스승들과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그 걸음걸음들은 올바르고 가치 있는 길을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으뜸 되는 가르침'(宗敎, Religio)이자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이어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인생을 길에 비유했을 때, 그 길을 마치 안내자나 지도, 나침반도 없이 길을 나선 나그네의 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신앙의 여정은 좀 특별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길이 있지만, 정작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마주 서야 하고 시시때때로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고독한 자신과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혼자가 아니고 초행길이 아닌 것 같지만, 궁극적인 질문들 앞에서 인생은 결국 혼자 선택해야 하고 그 길은 초행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모든 시대에 걸친 인간들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에 성경과 하느님의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참으로 마땅한 응답을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지금 여기서의 삶과 여정에는 길을 잘 아는 안내자와 그 가르침이 있고, 또 그가 가는 길마다 신호등과 표지판이 있습니다. 곧 신앙인에게 안내자는 지상의 여정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특히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이 자칫 길을 잃어 방황을 할 때면 길을 잃은 우리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시지요. 나와 하나인 신앙 공동체가 주님 사랑 안에서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지상 여정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노심초사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하느님과 그 나라로 가는 구체적인 방향까지 가르쳐주시며 안내서가 되어주는 성경도 우리 손에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지도처럼 혹은 안내서처럼 인생의 시작과 마침의 구체적 지침이 되어주기도 하지요. 뿐만 아니라 나침반의 역할이 되어주는 계명은 언제나 신앙인의 양심을 자극하며 하느님 나라의 삶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분께서 만물에 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의 활동을 알게 해 주셨다.……나는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 것도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지혜 7,17-21)


인간의 지성이 이미 기원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종종 모호하거나 오류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인간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106) 신앙은 이러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성을 비추어 주고 견고하게 합니다.(286)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3)




동행하는 사랑


아담과 카인처럼 일그러진 얼굴, 그 나약한 이름의 정체성을 '두려워하며 결핍된 존재'로 정의할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신(마태 12:28, 루가 11:20)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하시며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십니다.(요한 14,1) 그리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손을 내밀어주십니다.(마태 14,26)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26)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3) 또한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불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교리서 366; 요한 3,16; 로마 6,23)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예수님은 공동체가 찾아야 할 것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마태 5,3-12)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나라(예수)를 살아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요한 13,34; 루카 6,32.36)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의 지혜(잠언 8,22-31; 1코린 1,24)이셨으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10)


그러나 그 사랑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지요.(마태 16, 24)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마태 22,38.39)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오른 빰을 치는 사람에게 왼 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마태 5,40.44; 루카 6,28)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1베드 2,21.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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