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그것'을 ‘본래의 것’ 되게 하시는 영
방향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잔잔한 일상. 작은 일상의 조각들. 특별한 일도 없지만, 별 탈 없이 보내고 있는 일상의 자리. 그것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는 것. 그것으로 만족함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잔잔하던 내 안의 바다에 먹구름과 폭풍우가 일면 그 일상이 공허와 혼란으로 어두운 색으로 물들어가지요. 마주하고 있는 삶과 사람들이 거짓과 헛됨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힘들게 버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수많은 현실의 모순된 상황 앞에서 존재의 의미마저 의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한 영혼이 길을 잃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진실에 어긋날 때. 부정과 부패인 줄 알지만, 관행이기에 혹은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부추길 때. 스스로 자기의 거짓된 현실과 타협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계명과 순리에 어긋나게 살아가니까."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저 깊은 내면에서 울려오는 진실의 소리를 부정할 수 없고 오히려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자기를 더욱 선명하게 묵도하게 됩니다. 진흙탕과 같이 선이 부족한 삶으로 빠져드는 인생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영혼은 '참됨'과 '참 삶', 진실과 선과 더욱 갈망하게 되고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는 순간, 방황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 나침반과 지도를 찾게 되는 게 우리의 본성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질료: 가능태)을 ‘본래의 것’(형상: 현실태)이 되게 하시는 영
성령, 선한 영, 거룩하고 진실하며, 순수한 사랑의 영은 일그러진 욕망, 그 혼돈(混沌, 카오스χαος) 가운데에서 새로운 질서(코스모스κόσμος)를 이끌어냅니다. 성령의 창조사건입니다. 좌절과 절망, 상처와 탐욕 그 혼돈 가운데 쓰러진 영혼에게 성령은 새로운 창조(질서)를 시작합니다. 앙상하게 죽은 영혼에서 새 뼈와 살이 돋아나게 합니다. 생명의 길로 안내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영혼은 욕망의 늪에서 기도하는 삶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진실한 삶의 길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를 다시 일으켜 새운 것입니다.
한 영혼의 욕망이 기도로 바뀌는 순간 '그것'을 '본래의 것'으로 보게 되지요. 하느님의 나라, 천국에서는 모든 '그것'이 '본래의 것'으로 존재하며, 모든 것이 '그-자체'로 하느님으로 인해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그것(질료: 가능태)을 ‘본래의 것’(형상: 현실태)이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사랑의 안내자이며 모든 영혼들의 협조자이시며, 모든 영혼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성령은 모든 영혼들을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욕망의 인간을 본래 하느님의 형상으로 부활하게 하지요.
풍선처럼 날아가버릴 것들
한화로 자그마치 15억 4천만 원짜리 그림. ‘풍선과 소녀’라는 이름표가 붙은 그림이 경매소에서 낙찰되었습니다. 그런데 낙차가가 경매장을 울리는 순간 15억 4천만 원짜리 그림이 스스로 가닥가닥 찢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파쇄기 그 15억 4천만 원을 가닥가닥 찢어졌습니다. 지난 2018년 10월 5일.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등장한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 이야기입니다.
소녀가 풍선을 놓친 것인지, 아니면 풍선을 날려 보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소녀의 손에서 날아간 풍선과 소녀가 덩그러니 그려진 작은 작품입니다. 너무도 소박한 그림. 그리 크지도 않은 단순한 그림이 치열한 경매를 거쳐 우리 돈 약 15억 4천만 원에 낙찰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낙찰을 알리는 봉이 두드려지는 순간 경고음이 울리더니 그림이 액자 밑을 통과하면서 가늘게 잘려나갔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경매장은 일순간 혼란에 휩싸이고 직원들은 급하게 작품을 치웠습니다. 15억 4천만 원이 소녀의 풍선처럼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소더비 측은 "우리가 '뱅크시'에게 당했다"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쓰레기통 안에 있다’(Love is in the Bin)라는 새 이름을 단, 반쯤 파쇄된 이 그림은 앞으로 더 높은 가치가 매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풍선과 소녀'라는 제목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 손에서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손에서 날아가 버릴 것들을 퍼포먼스를 통해 인간의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기도(탐욕)를 쓰레기통으로('Love is in the Bin') 넣어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선과 소녀'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파쇄하는 작가의 과감한 퍼포먼스는 신앙인으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놓아버려야 하고 쓰레기통에 버려할 것들과 진실로 진실로 붙잡고 있어야 하고 찾아야 할 것들 말이지요.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힘겨워지는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홀가분한 삶, 어제보다 한결 가벼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데, 기도가 자꾸 욕망으로 변질되어 가는 세상입니다.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편하고 편리해야 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삶이 좀 가벼워지자고 아름다워지자고 소유한 것들이 자꾸만 우리의 삶의 방향을 틀어놓고 삶의 무게는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듯합니다. 거추장스러우면 불필요한 것이 맞을 텐데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성령(비둘기, 물, 불, 바람, 기름, 인호, 칼)의 은사와 열매
내 영혼이 드높은 가을 하늘을 둥실둥실 자유롭게 날아가는 풍선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둘기처럼 영원한 자유이신 아버지께로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도 꿔봅니다. 풍선처럼 비워진 채로 말이지요. 성령의 날개 위에 올라타고 한껏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물과 기름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나보다 더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로 그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참조: 갈라 5,13-14.16-17)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사랑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지르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영혼에 당신 현존의 불길로 1. 사랑과 2. 기쁨과 3. 평화와 4. 인내, 5. 호의와 6. 선의, 7. 성실과 8. 온유와 9.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참조: 갈라 5,22-23) 그래서 우리의 내적 인간이 영혼의 의사이신 성령의 칼로 굳세어지고, 믿음이 더해져서 갈등과 분열, 탐욕과 시기, 격분과 이기심을 일으키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희망과 사랑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참조: 에페 3,16-19)
분명 사랑으로 불타는 영혼의 의사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 성령의 불길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수난의 세례, 고통의 세례도 그분과 함께 달게 받을 수 있는 순수한 열망이 우리를 불태우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우리의 지성에는 슬기(sapientia), 통달(intellectus), 의견(consilium), 지식(scientia)의 선물을 주실 것이고 우리의 의지에는 용기(fortitudo), 효경(孝敬, pietas), 경외심(敬畏心, timor)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