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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20. 2023

소금단지

가시나무와 나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ㅡ 시인과 촌장



도대체 나는



내 속에 수 만 가지 잡다한 생각들과

결핍된 욕망의 꿈틀거리는

탐욕스러운 상상들은

내 안에서 내 꼬리를 삼키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물거품들은

내 진실한 꿈을 찌르고

네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지금은 그분의 머리 위에 얹혀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에 품에 안길 수 없습니다

새처럼 날고 싶어도

파란 하늘을 품고 싶어도

나는 한없이 무거운 나로 인해

도대체 홀로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함, 그분을 끊임없이 찬미함, 앞장서서 좋은 일을 하여 이웃에게 모범이 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며 부유합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으면 매우 비참하고 불행합니다.


하늘의 새가 먹이를 얻으려 땅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날갯짓하는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종도 이와 같이 곡 필요한 만큼만 땅에 머물고 즉시 영으로 하늘에 올라 하느님을 기리고 찬미해야 합니다.”  ㅡ 코베르티노의 성요셉의 강론집 "말과 생각에서" 중에서




교회 안에는 백여 번 넘게 ‘몸이 들어올려지는’ 은사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하늘을 나는 수도자’로 불린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 공중에 뜬 것이 아니라 탈혼 중에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때로는 천사처럼 날아올랐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목격담을 이야기합니다.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1603년 6월 17- 1663년 9월 18)입니다. 살아서 이미 성인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그는 1767년에 공식적으로 시성 되었는데요. 역시 미소와 쾌활함으로 잘 알려졌던 교황 요한 23세는 20세기의 과학발전에 발맞추어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을 모든 비행사와 우주비행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1603년  6월 17일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레체 근교 작은 도시인 코페르티노(Copertino)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7세기 교회와 유럽사회가 종교분열이라는 커다란 혼란과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성 요셉이 보여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과 소박함, 그리고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쾌활함은 그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하느님 백성들에게 큰 울림이 되었으며, 그는 스스로 복음이 되어 세상에 위로와 기쁨을 전한 목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의 성장 배경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힘입지 않고서는 그의 성격이 그토록 겸손하고 쾌활하며 밝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마구간에서 태어난 성인은 7살 때 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치병으로 곧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수년간 병상에서 누워 지냈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교육은 받을 수 없었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성인들의 삶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일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매료된 성인은 프란치스코 수도자가 되기를 꿈꾸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그의 소망대로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에 입회를 청합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수도회에서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수도회 밖에서 ‘헤벌린 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듯이 착하기만 했고 숙식을 함께 해야 하는 공동생활에 재빠르거나 능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쉽게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카프친 프란치스꼬회의 평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곳에서도 8개월 만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 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를 그냥 지켜보고 계시지만은 않았습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그로뗄라의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마부 노릇을 하면서 3회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정식 수도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늘 행복한 수도자의 표본이 되어 17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착하고 쾌활한 성인을 향한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끄셨습니다.


선천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함과 어릴 적 병으로 배우지 못하여 지적능력이 부족한 그를 하느님께서는 길 잃은 양들을 돌보는 사제의 길로 이끌고 계셨지요. 인간적인 방식이 아닌 하느님만의 방식으로 말이지요.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갖가지 많은 시험들을 통과해야 했는데,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요셉 성인에게 가장 힘겨운 관문 두 가지는 학문적인 역량을 평가받는 시험이었습니다.


부제 시험은 라틴어 성경 원문을 암송하고, 뜻을 해석하는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도우심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시험 당일 시험관 주교님이 시험문제로 펼치신 대목이 요셉 성인이 유일하게 외우고 있었고 평소 좋아했던 루가복음 15장이었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였습니다. 성인은 시험관 주교님이 놀라워할 정도로 한 문장도 놓치지 않고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627년 3월 20일 모두의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뒤집고 부제로 서품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사제품을 받기 위한 시험에서도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최종 시험에 5명의 응시자들이 있었고, 시험관으로 들어오신 주교님은 시험에 있어서 매우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성인은 마지막 순번으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술 형식의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앞서 시험을 보았던 4명의 응시자 모두가 우수하게 시험에 응했습니다. 시험관 주교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성인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바티칸으로부터 전령이 급히 달려와 시험관 주교님의 교구장 발령 소식을 전합니다. 부임할 교구로 급히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 소식에 몹시 흥분 시험관 주교님은 마지막 수험자였던 성인에게 “앞서 다른 4명의 동료들이 매우 우수하니, 동기인 수사님도 훌륭할 것이라 믿습니다. 굳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통과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나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인은 1628년 3월 28일 사제로 서품 되었습니다.


이 일화로 인하여 요셉 성인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과 학생들의 주보성인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요셉 성인은 하늘을 나는 비행사들과 우주 비행사, 그리고 여행자들의 주보성인입니다. 성인은 탈혼 중에 자주 공중으로 부양하여 "하늘을 나는 수도자"로 불렸기 때문인데요.

 

성인이 처음으로 탈혼을 체험한 날은 1630년 10월 4일이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던 중이었는데, 많은 신자들 앞에서 마치 천사처럼 공중으로 몸이 들어 올려지게 됩니다.


탈혼과 몸이 들어 올려지는 일들은 그 후도 자주 일어났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서 기도할 때, 혹은 십자가의 옆구리의 상처만 보아도 즉시 그의 몸은 들어 올려졌습니다. 탈혼 상태에서 그의 몸이 들어 올려지면 외부와의 감각은 중단되었고 오직 하느님 하고만 교감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단순하고 겸손하며 쾌활한 이 성인은 원장 수사의 이 부르심에는 즉시 순명하여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특별한 은혜를 받음과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과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능력도 있었다고 하지요.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만함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려 쉽게 엄숙함에 이르게 하고, 일종의 자기중심적인 심각함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 명랑함으로 올라와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본성적인 경향과도 같아 쉽게 행하게 된다. 반면에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사탄은 중력에 의해 추락하였다.” - G.K. 체스터튼 「정통」 중에서


유쾌하고 단순하며 기쁜 삶으로 누가보아도 가볍고 즐거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의심 많고 불평불만 속에 투덜거리며 무겁고 힘겨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안녕하십니까?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영성과 인성을 성화(聖化)시켜 주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또 그런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코베르티노의 요셉 성인처럼 모든 꿈을 하느님 안에서 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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