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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9장 마리안을 향한 두 음성

by 진동길

결정적 ‘패’를 위해, 흔들리는 결의

어수선한 실험실 한구석, 강제로 투여된 약물 탓인지 마리안은 반쯤 의식을 놓은 상태로 축 늘어져 있었다. 회색빛 기계 장치가 멈춘 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땀과 피가 엉겨 붙어 더욱 처참해 보였다.


소장 프레이저는 혼잡한 통제실에서 나와 그녀가 있는 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마리안의 여윈 어깨가 희미하게나마 들썩이는 듯했다.


프레이저는 철창문 가까이 다가서, 한숨을 삼키듯 낮은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마리안…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그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창백한 얼굴의 마리안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서진 않아.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물론 의식이 온전치 않은 마리안이 이 말을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프레이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남들 눈엔 내가 단지 그녀를 병기로 만드는 미치광이 소장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그는 빛바랜 형광등 아래서, 마리안의 호흡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오르내리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체제를 뒤엎을 ‘패’를 만들겠다는 욕망이 그를 여기까지 몰아붙였지만, 그 과정 또한 마리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새긴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짓눌렀다.


프레이저는 작은 숨을 내쉬더니, 마리안을 향해 다시 담담히 속삭였다.
“준비를 서두르자….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어. 조금만 더 버텨 다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 말 한마디에 맺힌 결심을 곱씹으며, 그는 실험실 문을 돌아 나왔다. 이번 대대적 진압으로, 정부군이 얼마나 극단적 수단을 선호하는지 새삼 깨달은 이상—마리안을 단순 병기가 아닌, 체제를 무너뜨릴 결정적 ‘패’로 키우겠다는 의지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 이미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고, 은신처마저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프레이저는 지하 어딘가에 남았을지 모를 소수의 생존자가 작은 균열을 만들어 주길 바랐다.




저녁 식사 전의 소란

수용시설 복도는 긴장과 불안이 엉켜 이루 말할 수 없이 뒤숭숭했다. 비상 경보 싸이렌이 울리고, 가끔가다 폭발음 같은 둔탁한 소리가 터질 때마다, 재소자들은 움찔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미리암(Miriam)역시 그 살벌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기! 뭐 해?! 빨리 안 움직여? 전부 자기 구역으로 들어가라!”


한 교도관이 예민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미리암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숙여 보였다. 이곳에서 괜한 시선을 끌면 순식간에 교도관들의 집중 포화가 쏟아질 터.


(결국… 은신처가 무너졌다는 거로군. 제이드와 피터는 무사할까….)


이미 예지(豫知)로 은신처 붕괴를 감지했던 그녀였지만, 체감되는 현실은 상상 이상의 음산하고 시끄러운 공포를 풍겼다. 바삐 뛰어다니는 교도관들의 거친 발걸음 위로, 재소자들이 서로에게 내뱉는 숨죽인 속삭임이 복도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가까이서 누군가는 불안한 기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속삭였고, 멀리서 다른 누군가는 “폭발음이 계속 들리는 걸 보니... 은신처 쪽이 완전히 박살 난 것 같아.” 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든, 교도관들이 곧장 노려보면 대화는 금방 끊겼다. 모두가 말 몇 마디 잘못했다간 가혹한 처벌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 똑바로 안 떠! 정렬해!”


또 다른 교도관의 매서운 고함에, 재소자들이 서둘러 줄을 맞췄다. 그 틈에서 미리암은 짧게 숨을 삼켰다. 의도적으로 자신이 ‘위축된 재소자’처럼 보이도록 행동했지만, 내면은 이미 수많은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은신처를 잃었다면… 남은 건 무엇일까. 제이드와 피터가 과연 무사히 빠져나갔을지… 그리고… 마리안은….)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실험대로 끌려가는 마리안의 모습이었다. 예지로 어렴풋이 본 장면일 뿐이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처참할 공산이 컸다. 이곳 교도관들의 태도나 수용시설의 ‘긴급 대응’ 같은 움직임은, 상황이 이미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웅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몇몇 재소자들이 교도관의 지시에 따라 식당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리암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결코 평온한 저녁 식사가 될 리 없었다. 뒤에서 또다시 들려오는 짜증 섞인 고함이, 삽시간에 복도 전체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정신들 안 차려?! 식사 시간 늦어진다! 빨리빨리 안 움직여?!”


미리암은 마치 폭풍전야 같은 이 느낌이, 오늘 밤 무언가 더 큰 사건의 전조가 될 것만 같았다. 은신처가 무너졌다면, 정부군이 배스토니 시설까지 예의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 교도관들의 날선 태도도 더욱 극단적이 될 수밖에. 공포와 긴장, 그리고 예지된 불행이 겹쳐, 복도 공기는 살을 에는 추위처럼 서늘했다.


(…그래도,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그녀는 짧은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다시금 살짝 숙였다. 수없이 반복해 온 ‘순응’의 제스처. 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달아올랐다. 마리안이 처한 고통, 제이드와 피터의 생존 여부,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역할—그 모든 것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적당히 굴지 말고 빨리 따라와!”

교도관이 또 한 번 소리치자, 미리암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줄을 맞춰 걸었다. 비록 이 순간만큼은 다른 재소자들과 다르지 않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보는 ‘미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 모든 무질서와 폭압의 체제를 무너뜨릴 실마리… 언젠가는 찾아올 거야.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그렇게 미리암은 가슴 깊은 곳에 묻힌 희미한 믿음을 붙들고, 불안함으로 가득 찬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식당 — 저녁 식사시간

커다란 철문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서자, 재소자들과 교도관들 수십 명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치 바람 불기 전 빽빽한 나무숲 같은 분위기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경보음이 머나먼 구역에서 퍼져오고,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폭발음”에 대해 입을 모아 불안을 토로했다.


“방금 외곽에서 드론들이 엄청나게 움직이던데…?”
“그러게, 은신처인가 뭔가… 완전히 쓸려나갔다던데.”
“또 군부의 무력시위겠지. 이런 짓도 한두 번이 아니잖아.”


이렇듯 소문은 사방으로 번졌으나, 교도관들의 날 선 눈빛이 도처에 꽂혀 있어서 대화는 점점 낮아지고 조용해졌다. 조금만 방심해도 잔혹한 제재를 당할 수 있음을 모두가 아는 터였다.


미리암은 받은 식판을 들고 구석자리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표정,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정보 파편들을 세심하게 포착하기 위해 넌지시 식탁 사이를 살폈다.


“마리안이 또 실험에 끌려갔대. 이번엔 영양제랑 약물을 더 주입한다고…”
“소장이 직접 지시했다니… 저러다 몸에 치명적 무리가 오지 않을까.”
“조용히 해. 교도관 눈치도 안 보여? 들키면 우리도 위험해.”


마리안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미리암은 식판 위 죽을 뜨던 손을 멈췄다. 곧 머릿속에, 실험대로 끌려가던 마리안이 떠올랐다.


(영양제를 주입한다면 차라리 다행이긴 해… 그래도 정신적 고통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바로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서 “꽝!” 소리가 울려 퍼졌고 교도관의 호통이 터지자 식당 전체가 일시에 침묵했다. 순간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몸에 파고들어, 미리암은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렸다. 재소자들도 오늘 저녁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듯했다.




여운 남긴 식사

수저 소리조차 잦아들 무렵, 재소자들은 한 줄로 서서 식당을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교도관들은 한층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나하나 점검했으나, ‘위장’에 익숙한 미리암은 표정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줄을 맞춰 움직였다.


(마리안... 혹시 이 근처 어딘가로 지나가진 않았을까…?)


미리암은 시선을 살짝 돌려 식당과 연결된 복도, 창문 주변, 혹은 옆문의 문틈을 엿봤다. 하지만 예상대로 마리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로 독방에 옮겨졌을 터였고, 오늘처럼 경계가 강화된 날엔 재소자의 이동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줄 서서 이동해! 틀어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교도관의 호령에 재소자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미리암도 이내 시선을 앞만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마리안… 어떻게든 견뎌 줘.)


지금은 어떠한 행동도 위험하다는 판단에, 그녀는 잠시 후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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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호 시간, 소리 없는 메시지

늦은 저녁이 되자, 각 구역에서 점호가 진행되고 재소자들은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교도관들은 한층 까다로운 불시 점검을 거듭했고, 시설 곳곳은 여전히 대대적인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미리암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무겁고 번잡한 발소리, 때때로 들리는 구타 소리 같은 음산함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 의식을 몰입했다. 심장이 점점 느려지고, 주변 소음이 희미해지는 순간, 텅 빈 어둠 속으로 미리암의 정신이 뻗어나갔다.


“마리안… 들려?”


소리 없는 목소리가 미리암의 내면을 타고, 머릿속 암흑을 건너갔다.


“네가 겪고 있는 고통, 알아. 하지만… 포기하면 안 돼.”


그녀는 숨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서는 실험대 위 마리안의 힘겨운 환영이 겹쳐 보였다. 이어서 더 구체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소장 프레이저… 사실 그는 반군 편이야. 그리고… 네 남편의 뇌를 가진 레플리칸트인 것도 알아해. 지금 네가 받는 이 훈련은, 결국 ‘새로운 세상을 이끌 리더’를 만드는 과정이야. 이미 반군 지도자들은 널 리더로 선출했고, 소장은 그걸 돕고 있어.”


머릿속에서 마리안의 남편과 소장 프레이저가 얽힌 비밀스러운 장면들이 잔상처럼 스쳐갔다. 미리암은 예지와 심령적 연결을 통해 이를 알아냈다. 세상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복합적 진실이, 지금 이 교정시설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고통스럽겠지만… 이 훈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줘. 소장은 네게 진심으로 무언가를 전수하려는 것 같아. 네가… 반군의 진짜 리더니까.”


복도를 순찰하던 교도관의 그림자가 문틈에 어른거렸다. 미리암은 숨을 죽인 채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우린 네가 필요해, 마리안. 네가 세상을 뒤엎을 사람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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