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마리안의 첫 시험, 그리고 불협화음
오리온이 감찰 장교 세력과 교전을 벌이던 그 시각, 교정시설 지하 밀실에선 마리안(Marian)이 초강화 전투복을 착용한 채 최종 세팅을 받고 있었다. 연구진들은 그녀의 뇌파와 합성 혈액 수치를 검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마리안은 허리에 감긴 장비 벨트가 묵직했지만, 이전처럼 극심한 통증이나 혼란에 시달리진 않았다.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내가 이 힘을 어디에 써야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미리암(Miriam)이 조용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리안, 마음이 어떠세요? 아직 고통이 남았나요?”
마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감정이 또렷해졌다는 점을 느꼈다.
“이 이상한 전투복도, 고통도… 지금은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소장님이 머잖아 당신을 실전에 투입하려 할 거예요. 그때도 스스로를 잃지 않길 바랍니다.”
미리암이 애틋한 눈길로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감정 회로가 너무 극적으로 폭주하면, 혼수상태나 기억 소실이 올 수도 있어요.”
마리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한번 내가 무너진다면, 이 지옥 같은 시설에서 벗어날 기회를 영영 놓치겠지.’
하지만 그녀는 남편 마이클의 죽음과, 배신당했던 수많은 과거를 떠올리며 결심했다. “절대 쓰러지지 않겠다.”
“혹시 외부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마리안이 물었다. 미리암은 잠시 주변을 살핀 뒤, 낮게 대답했다.
“소장님이 외부 침투조를 불러들이고 있어요. 감찰 장교 무리와 충돌이 예상되고… 이 시설이 전장으로 변할 수도 있죠.”
마리안은 심장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와 기대가 뒤섞여, ‘나도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마치 가슴속에 심지가 타오르는 듯했다.
위층 지휘실에서 소장 프레이저(Frasier)는 오리온 측 보고를 받았다. “감찰 장교 세력을 제압했고, X국 고문단과 사도단 연락원들이 무사히 들어왔다”는 요지였다.
프레이저는 짧은 미소를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내부 교도관 중 일부가 감찰 장교 편을 들고 있고, 더 많은 병력이 몰려올 가능성도 있다.
“제로(Zero), 드론 망을 교란해. 추가 감찰 병력이 접근하면, 바로 알 수 있도록.”
“네, 소장님.”
제로가 즉각 반응하며, 주변 단말기와 연결된 해킹 모듈을 조작했다. 교정시설 외곽과 상층부를 감시하는 드론 신호를 가로채려는 시도다.
프레이저는 곧장 근위 교도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리온과 X국 고문단을 안내해, 이 지하 구역으로 데려와라. 나와 직접 면담하겠다.”
수화기 너머에서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렸고, 프레이저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이먼 벨 측에서 추가 파견을 보낸다면, 곧장 이 교정시설을 ‘반역의 소굴’로 몰아갈 공산이 크다.
“결국… 레플리칸트 부대를 공개해, X국을 비롯한 사도단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시점이 왔군.”
하지만 프레이저도 내심 불안했다. ‘아직 12 사도단이 완전체로 준비되지 않았는데… 정말 외부에 노출해도 되나?’
특히나 감정 회로가 예민한 마리안이 과연 실전에 투입될 준비가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소장님, X국 대표가 곧 도착합니다!”
통신이 들어온 직후, 프레이저가 지휘실 밖으로 나섰다. 그의 뒤를 미리암이 따라갔고, 제로는 해킹 패널을 지키고 있었다.
교정시설 지하 큰 복도에선 이미 오리온이 감찰 장교 잔당을 제압해 둔 상태였고, 거친 숨소리를 내쉬는 랭던과 고문단 요원들, 그리고 제이드·피터가 함께 있었다. 가로등처럼 매달린 희미한 전등 아래, 시멘트 벽에 군데군데 총탄 자국이 박혀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입니까?”
랭던이 총을 내리고 앞장섰다. 그는 눈가에 살짝 의심을 품었지만, 그래도 정보대로라면 이가 ‘레플리칸트 부대’를 키우는 인물, 곧 사도단과 X국을 잇는 핵심 인물이다.
프레이저는 짧게 목례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 지하에 들어오느라 고생이 많았군요. 사이먼 벨 측 감찰대와 충돌이 있었지만…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랭던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 부하 아니었나요?”
“공식적으론 그렇죠. 하지만, 이미 저와 그들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프레이저는 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우리 ‘프로토콜 구역’에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스르륵— 지하 복도 옆문이 열리고, 연구실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그 끝에서, 전투복 차림의 레플리칸트들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등 뒤에 무장을 짊어지고, 특수 헬멧을 벗은 이들의 표정은 묘하게 결연했다. 오리온·제로를 비롯해, 또 다른 2~3명의 레플리칸트 대원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제가 만든 ‘12 사도단’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검증… 직접 확인하게 될 겁니다.”
프레이저의 차분한 목소리가 어딘가 서늘하게 울렸다.
고문단과 사도단 대표가 레플리칸트 부대 면담을 진행하기 직전, 실험실 문이 다시 열렸다. 마리안(Marian)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붉은 사리 대신, 암청색 전투복을 입고 몸을 가볍게 풀어 본다.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흘렀다.
“저 사람은…?”
랭던이 물었을 때, 프레이저가 짧게 답했다.
“가장 중요한 레플리칸트입니다. AI 전쟁 당시 설계된 ‘최신 감정 회로’ 모델. 인간과 다름없는 감정 능력을 갖췄고, 전투 기술도 급속히 흡수 중이죠.”
마리안은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 눈동자엔 불꽃이 일렁였다. “반갑습니다.”
어딘가 기품이 감도는 목소리에, 랭던조차 잠시 말이 막혔다. 고문단원들도 “정말 기계 같지 않다”며 귓속말을 나눴다. ‘이게…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라, 거의 인간이잖아.’
제이드와 피터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이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마리안… 그리고 프레이저가 숨기던 비밀 병기군.’
제이드가 살짝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마리안은 서툴게 미소 지었다. 둘은 곧 눈빛만으로도 ‘우린 같은 편’이라는 공감을 느꼈다.
X국 고문단은 곧 “자신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레플리칸트 몇 명이 강하냐 여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와 협력하면, 사이먼 벨이 통솔하는 독재정부에 맞설 전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당신들의 의도는 뭔가요, 프레이저 소장?”
프레이저는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이먼 벨이 이끄는 독재 체제가 지구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건, 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레플리칸트 부대를 만들어, 결정적 순간에 그에게 반기를 들려하는 중이죠. 다만, 아직 병력이 완성되지 않아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랭던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 시설(교정시설)을 지배하는 건가요? 정부군이 알아차리면 어쩌려고?”
프레이저는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이미 일부는 감지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까 감찰 장교가 몰래 침투해 왔죠. 이제 우리도 숨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탈출해 함께 전선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프레이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죠? 배스토니는 지상·하늘·지하 전부 요새화된 구조입니다.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켜 문을 연 뒤, 일거에 봉기해야만 대규모 탈출이 가능해요. 그 준비가 딱 지금 막바지 단계였는데, 사이먼 벨 측이 더 빨리 움직였을 뿐이지요.”
순간적인 긴장감이 교차했다.
‘교정시설 내부 봉기’— 듣기만 해도 엄청난 유혈 충돌이 예고됐다. 레플리칸트,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정부군·감찰대까지. 모든 세력이 뒤엉킨 지옥도가 펼쳐질 수 있었다.
“우리가 협력하겠어요.”
마리안이 불쑥 나섰다. 감정이 격해 보였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더는 이런 ‘감옥’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요. 밖에서 싸우고, 내가 원하는 미래를 잡고 싶습니다.”
그 말에, 오리온과 제로, 다른 레플리칸트 대원들도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12 사도단은 원래부터 자신들이 ‘인간과 동등하게 사는 세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 꿈을 위해 프레이저와 손잡았지만, 이제 실제 전장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랭던은 주위 동료와 재빠른 교신을 나눈 뒤, 결론 내렸다.
“좋습니다. 우리 X국은 여러분이 ‘실전 능력’을 보여 준다면, 즉시 군사 지원을 약속하겠습니다. 교도시설 안의 봉기를 도울 수도 있어요. 다만, 여러분이 독재 정부를 진짜로 무너뜨릴 의지가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피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12 사도단이 먼저 움직여서 교정시설 통제권을 쥐고, 상층부에서 내려올 정부군을 막아 내야 한다는 얘기네요.”
프레이저는 굳은 표정으로 단말기 화면을 가리켰다. “내부 교도관 중에도 우리 편이 있으니, 그들을 포섭해 감찰 장교 측과 싸워야 합니다.”
마리안은 처음 착용한 전투복에 손을 익히며, 스스로에게 되뇐다.
‘드디어 나갈 수 있겠구나. 이곳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세상 전체를 뒤흔드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군.’
가슴속엔 복잡한 감정이 맴돌았다. 슬픔과 분노, 복수심이 어지럽게 뒤섞였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이 맑았다.
소장 프레이저는 외부와 연결된 패널을 확인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이먼 벨… 네가 날 배신자라 부른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마. 그 대신, 네가 쌓아 올린 이 독재를 내가 레플리칸트들과 함께 무너뜨릴 것이다.”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 에데이 샤하르 사람들, X국 고문단, 그리고 12 사도단.
이제 이들의 이야기는 ‘배스토니 교정시설 봉기’라는 형태로 하나의 무대에 모이기 시작했다. 교도소라는 커다란 감옥이 곧 혁명의 진원지가 되리라, 누구도 상상 못 했겠지만… 이미 불가역적 흐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