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e Maria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

by 진동길
2-the-annunciation-bartolome-esteban-murillo.jpg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 스페인 바로크 화가, 1660년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


성모송 전반부에서 특히 눈부시게 빛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표현입니다. 라틴어 본문에서는 이를 “gratia plena”라고 하여, 말 그대로 “은총으로 충만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우리말로도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포근하고 아름다운 말씨로 옮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의 뿌리는 한 단어로 이루어진 그리스어 원문, 곧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께 건넨 인사말 “케하리토메네(κεχαριτωμένη)”입니다. 이 단어는 “은총을 입다”라는 동사의 ‘수동태 완료형 분사’로서, 문자 그대로 “이미 은총을 가득히 부여받은 분” 또는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온전히 채워진 분”이라는 심오한 뜻을 지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께서 이미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선택을 입은 특별한 존재이며, 앞으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도록 미리 준비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이 풍요로운 개념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는 “gratiae plena” 대신 “gratia plena”라고 옮겨, 한층 더 직접적이고 힘 있는 어조로 ‘충만한 은총’이라는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호칭은 많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이제는 마리아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상징적 이름이 되었습니다. 곧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이라는 말 자체가, 마리아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과 사랑으로 가득한 존재라는 신앙고백이 된 것입니다.


Bartolomé_Esteban_Perez_Murillo_021.jpg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이와 같은 표현은 구원과 은총에 관한 가톨릭 신학의 핵심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마리아께서 받으신 은총은 결코 본인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룬 것이 아니라, 오롯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신 의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흐트러진 인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한 여인을 택하시어 원죄의 얼룩마저도 미리 막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가톨릭 교회는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로 선포합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잉태 순간부터 미리 입어, 전 인생을 온전히 은총으로만 채워졌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를 향해 “은총을 입은 이여”라고 부른 것이고, 마리아는 이 특수한 은총 안에서 참으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특히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이라는 말은, 마리아와 성령과의 친밀하고도 오묘한 관계를 살포시 비춰 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네 위에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라고 전했는데, 성령이 마리아 위에 강림하시자 마리아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기념하며 마리아를 “성령의 신부”라고 높여 부릅니다. 성령의 현존이 마리아의 온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기에, 실제로 마리아야말로 은총으로 완전히 충만하신 분이 되신 것이지요.


우리가 성모송에서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 부르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 가득 머물러 계시고, 또 그분으로 인해 마리아가 온통 은혜에 젖어 있었음을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마리아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 안에 살기를 바라는 깊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성모송을 되뇌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은총이 내 삶에도 풍성히 흘러들어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며, 우리 자신도 은총 속에 머무는 존재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듯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이라는 짧은 구절이 지닌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합니다. 그 말 안에는 마리아를 택하신 하느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성령의 능력이 덮으시는 새 창조의 기쁨, 또 메시아의 어머니로 봉헌된 마리아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이 찬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가 이 표현을 되뇌는 순간순간,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끄시어, 주님의 사랑이 한없이 부어지는 은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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